읽을꺼리


문화연구에서 그람시의 적절성

스튜어트 홀

 

해설 : 현재 개방대학에서 그간의 개인적·집단적 연구성과를 대중화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는 스튜어트 홀은, 학제를 넘나드는 독특한 연구방식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축적하여 '문화 연구'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영국 버밍엄대학 현대문화연구소(CCCS)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 하나이다.

문화연구는 한 대학의 영문학과에서 단지 이론지향적인 기획으로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 기원과 지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1950년대 영국 상황에 대한 검토로 잠시 우회할 필요가 있다. 1945년 파시즘의 패배 및 그에 이은 노동당의 집권이라는 상황을 맞이하여 일군의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행을 위한 전진적인 프로그램을 내지 못하던 노동당과 공산당의 무능함이 냉전의 격화와 중첩되면서 그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들은 다른 전략을 구상해야 했다(50년대 말 시작된 신좌파의 흐름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전쟁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노동계급 교육의 틀을 재편해야 하는 상황이 이와 맞물리면서, 노동계급 교육은 민중교육/성인교육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틀로 대학에 편입된다. 그 과정에서 대학 밖에서 노동계급과의 만남을 지속했던 지식인들도 함께 편입되었으며(대표적인 예로 에드워드 톰슨과 레이몬드 윌리엄즈를 들 수 있다), 성인교육 커리큘럼 또한 문학-예술 등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노동계급-민중의 문화에 대한 규명을 통해 사회운동에 기여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처럼 영국에서의 문화연구는 민중교육이라는 정치적 시도의 일환으로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홀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현대문화연구소는 톰슨, 윌리엄즈, 호가트로 대표되는 50년대의 이러한 흐름의 연속선상에서 출발했다. 문학적 색채를 짙게 드리우면서 넓은 의미에서 정서구조(structure of feeling)와 관련된 연구에 집중했던 초기와 달리, 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알튀세르로 대표되는 대륙의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를 상당 부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영국 문화연구 1세대들과 기본적으로 연속선상에 놓여 있기에, 구조주의적 설명에 완전히 함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들은 70년대 중반 이후, 문화주의와 구조주의를 매개할 수 있는 인물로 그람시에 주목한다.

이 기간 동안의 홀의 지적 궤적 역시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틀, 즉 노동계급의 능동적 문화 생산에 주목하는 문화주의 및 의미작용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구조주의적 문제틀의 비판적 수용, 헤게모니와 국면 분석 등에 관한 그람시 이론의 수용을 통한 양자의 종합 시도로 축약될 수 있다. 홀은 이러한 틀에 기초하여 미디어, 하위문화, 포스트모더니즘, 정체성 및 대처리즘에 대한 국면 분석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유용한 연구를 남겼다.  

독창적인 대가라기 보다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자원들을 맥락에 따라 잘 정리하는 쪽에 가까운 홀의 스타일은, 1986년에 쓰여진 이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 글에서 헤게모니, 국면-세력 관계 분석, 대중의 상식에 대한 주목 등 그람시 사상의 제 요소들이 문화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 적절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 중에서도 특히 그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진 주제인 인종-종족-민족 연구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이탈리아라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기반하여 그람시 사상을 조목조목 정리하되, 그 함의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확장하고자 하는 홀의 해석 방식은 매우 복합적인 그의 사상을 단 몇 개의 어구로 축소시켜 손쉽게 정리한 후 박제화시켰던 남한 연구자들의 경향을 비판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그람시 사상의 현대적 확장이 '특정한 문제에 대한 그의 사고를 직접적으로 이전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그의 독특한 이론적 조망을, 그 영역을 규정하고 있는 미발달된 이론적-분석적 문제들에 집중하는 문제'라는 홀의 지적은 기억할 만하다.

이 글에서 홀이 명쾌하게 정리한 내용, 즉 문화연구에 그람시 사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예는 앞에서 거론한 톰슨, 윌리엄즈와 CCCS 외에도 수용이론과 관련된 성과 등 이미 여럿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이 글에서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 인종-종족-민족 부문과 보다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작업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리엔탈리즘 분석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사이드는 자신의 방법론적 기반 중 하나로 그람시를 활용하면서, 시간성을 중심문제로 삼고 있는 루카치와 달리 그람시는 지형, 영역, 블록, 지역 같은 지리적 용어들로 역사적 현실을 파악하는 감각이 탁월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간 맑스주의가 간과한 측면 중 하나인 공간적-지리적 불평등과 위계제에 대한 비판적 감각을 회복하는 데 그람시가 중요한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지적 또한 이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그람시 사상에 대한 충실한 규명과 현대적 확장은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의 사상을 상당 부분 박제화시켰던 우리 맥락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최근에 우리에게 소개된 르네이트 홀럽의 저작은 주목할 만하다. 92년에 쓰여진 이 저작에서 홀럽은 문학, 연극, 언어학 등에 대한 그람시의 분석을 프랑크푸르트 학파, 벤야민, 브레히트, 블로흐 및 러시아의 언어학자 볼로쉬노프 등과 같은 20세기의 여타 지적 흐름과 비교-대조하는 방법을 통해 그람시 사상의 함의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러한 분석은 그간 간과되었던 영역으로 그에 대한 연구를 단순히 확장하는 수준을 넘어서, 정치/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분석과의 유기적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특정한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대응을 해명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람시의 '대응 구조'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홀럽의 저작은 이 글에서 홀이 시도한 방식과도 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체적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의 분석이 그람시에 대한 우리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며, 발달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그람시 사상의 광맥을 탐사하는 작업은 이제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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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에서 사이버 스페이스로 : 제퍼슨, 그람시, 그리고 전자적 공유지

마크 서먼

 

해설 : 존 다우닝의 {변혁과 민중언론}(김종철 역, 창작과비평사, 1989)를 관심을 갖고 읽어 본 이들이라면 이 글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급진주의 미디어론의 '디지털 버전'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진보적 통신네트워크인 Webnet에 관여해왔으며 스스로 오랜동안 대안미디어 운동에 종사해왔던 마크 서먼은 최근의 인터넷 모델이 그람시적 대항문화 매체의 새로운 물결을 가능케 하며, 이의 제퍼슨주의적 기초를 재건할 최상의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퍼블릭 엑세스 TV에서의 필자의 경험을 반추하며, 인터넷과 같은 전자적 공유지 모델은 이제 자치적 행동주의 미디어에 필수적 토대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최근 더욱 현실화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해 시애틀시위 당시에도 독립미디어센터(http://www.indymedia.org/)를 중심으로 꾸려진 미디어 활동그룹은 시애틀 곳곳을 누비며 현장을 인터넷으로 중계했다. 이런 모습들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마크 서먼은 제퍼슨주의와 그람시주의가 각각 어떤 맥락으로 70, 80년대 미디어 행동주의와 결합해왔는가, 그리고 독립 미디어 운동이 현실적으로로 처하게 되는 자세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등의 굵직한 문제들을 비록 북미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들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와이어드>지의 안일한 자유주의 혹은 기술결정론적 이데올로기가 갖는 문제나, 대안적 대항문화 기관을 자치적으로 건설하는 것의 중요성 역시 언급된다. 부록으로 실린 부분은 '헤게모니'를 독창적이고도 실감있게 설명하는, 필자의 보너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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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테크 선물경제

리처드 바브룩


해설 : '인터넷'은 완전히 새로운 교류방식이 가능하도록 해 주었고, 많은 이들은 그것에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읽어내려고 한다(혹은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터넷 혁명' 혹은 '정보통신혁명'을 통해 인류사의 새로운, 그러나 훨씬 평등하고 바람직한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믿는 이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는, 전지구적 상업주의의 물결 속에서 그와 같은 요소들이 얼마나 온전히 그 원형을 보존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라는 점이다. 저자는 인터넷을 통해 구축된 새로운 교류방식 -- "선물경제(gift economy)" -- 과 60년대 신좌파의 아나코-코뮤니즘 사이의 정서적 친화성에 주목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화폐-상품 관계 및 국가와 공생함을 지적하면서, 이를 하나의 '혼합경제'로 지칭한다. 이 혼합경제에 내재해 있는 아나코-코뮤니즘을 어떻게 전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미흡한 듯 하지만, 최소한 네트의 혼합경제 도처에 아나코-코뮤니즘이라는 지뢰(?)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깔려있는가를 확인해 보는 것만으로도 그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영감을 얻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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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와 가상의 치아파스 : 마술적 사실주의와 좌파

주디스 애들러 헬먼


해설 : 이 글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에게 중남미 대중운동에 대한 '매혹'을 재생시킨 대표적 사례인 사파티스타의 운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런 글이라면 이미 제법 많이 보아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 운동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이 글은 실제의 사파티스타 운동이 우리가 건너건너 접하게 되는, 특히 인터넷을 통해 알게되는 그 운동인가를 묻는다. 말하자면 인터넷 화면 위에 뜨는 스키마스크의 아이콘, 투쟁속보와 지원요청들, 멕시코 사회운동의 지도 등이 이 운동을 충분히 반영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저자의 대답이며, 좀 더 엄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 자체가 갖는 일정한 굴절이 있고, 또 정보수취원의 편파성이나 치아파스 지역 사회운동의 역사적 복잡성도 지적된다. '시민사회'라는 개념이 갖는 모호성도 문제가 된다.
요컨대 이 글은 '교훈적'으로 읽힌다. 네트 상의 정보나 공동체, 운동들의 성격에 대한 환기는 국내의 정보통신 운동 또는 정보통신의 활용에도 일정한 시사를 줄 것 같다. 사회학이나 인류학 방법론 측면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 '과학적'인 국제연대를 고민케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교훈이 아닐까.
원래 이 글은 "필수적인 그리고 필수적이지 않은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레오 파니치 등이 관여하는 북미의 연간지 Socialist Register 2000년호에 실렸던 것으로 신기섭님의 홈페이지 "밑에서 본 세상(http://user.chollian.net/~marishin)에 신기섭님이 번역해 올려놓은 것을 편집부가 허락을 얻어 다듬은 것이다. 전재를 허락해 준 신기섭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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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파평론>의 갱신

페리 앤더슨


해설 : <읽을꺼리>의 중요한 자료 창고이기도 했던 영국의 유수한 좌파 이론지 <신좌파평론 New Left Review>이 지난 50여년간 잡지 잘 내놓고 나서 2000년 1월호를 갑자기 통권 1호라고 냈다. 알고보니 '재창간'의 각오로 이 시대의 정세와 맞닥뜨리겠다는 것이라는데 ... 그 각오가 여기 앤더슨의 글에 담담히 표명되어 있다. 미국의 Monthly Review는 그 7/8월 특집호 '편집자의 말'에서 앤더슨의 이 글을 이 시대의 비관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다. 사실 NLR의 현재 편집진들과 MR 편집장 엘렌 메익신스 우드는, 그가 NLR 편집위원 중 한 명이던 80년대 당시부터 영국의 광부파업투쟁에 잡지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를 두고 격한 논쟁을 벌인 전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노선 문제라기 보다는 기질 차이의 문제일 뿐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의 최근 형태에 대해 굴복하지 않고 '제 3의 길'류의 항복 노선에 동참하지 않은 채 '변화'와 '변혁' 모두를 놓치지 않겠다는 정신은 한결 같다.
한편 앤더슨과 NLR의 변신에 대해 보리스 카갈리츠키와 타리크 알리는 Znet(http://www.zmag.org/)을 통해 다소 감정적인 언사를 주고 받았다. 문제의 글들, 즉 카갈리츠키의 [NLR의 자살] 및 타리크 알리의 [카갈리츠크에대한 답변]의 한글 번역본은 "밑에서 본 세상" 웹사이트(http://user.chollian.net/~marishin/)에서 볼 수 있다. 카갈리츠키의 트집과 알리의 대꾸는 사담(私談)의 차원에서도 수준이 좀 낮다. 변비 있으신 분은 화장실에서 벗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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