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꺼리


주당 35시간 노동 - 현실적인 유토피아

미셸 뒤퐁 외 

 

노동시간 단축은 현재 제출되고 있는 노동계급 요구안들 중 진보진영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는 거의 유일한 구호인 것 같다. 자본가들의 구조조정을 따라 외치는 개량주의 논조의 매체에서부터 가장 전투적인 노동운동 진영까지 모두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확대, 공유"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경제위기에 처한 한국사회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이미 몇 년전부터 독일 금속노조의 노동시간 단축 운동에 대해 들어왔고, 최근에는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노동시간 단축 법안 통과 소식에 흥분하기도 했다. {읽을꺼리} 2호에 소개된 바 있는 [국제적인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향하여]에서 킴 무디(Kim Moody) 역시 새로운 노동운동 국제주의의 주요 구호로서 "노동시간 단축"을 꼽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구호를 둘러싼 쟁점들과 각각의 이념적 지향 사이의 각축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더구나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론적-실천적 준비정도도 그렇게 높은 수준은 못된다. 다음에 번역된 유럽 각국의 사례들은 이런 게으름을 벌충해보려는 작은 시도들중 하나다.

문제가 되는 것들중 가장 첫 번째는 노동시간 단축이 경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본가측에서의 노동시장 개혁, 즉 유연화와의 관계이다. 커다란 테두리 내에서는 둘 사이의 대립이 분명히 드러나지만 개별 사업장 수준에서는 두 노선이 사실상 혼재하는 갖가지 변칙이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보다 앞선 유럽의 경험자들의 전언이다. 가령 작업장 수준에서는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시간 재배치가 모호한 형태로 경합한다(둘의 구분에 대해서는 {노동사회} 24호, 1998년 7/8월호의 108쪽 참고). 또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확보된 만큼의 일자리들이 개별 기업에 의해 주로 임시직 형태로 확충될 경우 이는 노동계급의 삶의 질보다는 오히려 자본의 구조조정 요구에 더 이로운 것일 수도 있다. 더구나 우리처럼 당장 개별 기업의 기존 고용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방어하는 것이 급선무인 경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조정이 실질 임금의 하락과 맞교환되는 좋지 않은 선례가 확산될 수도 있다. 이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말 안에 포함된 다양한 변형들을 드러내주는 것이며, 따라서 이 전략-요구에 대한 보다 주의깊은 천착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런 점에서 당장의 최소 요구 수준을 넘어선 이행적 요구로서의 노동시간 단축 요구의 의미가 부각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진정 노동계급에 의해 주도되는, 노동계급을 위한 노동시장 개혁안이 되려면, 여기에는 개별기업에서의 단협 수준을 넘어선 노동시간 단축 입법화, 단축분만큼의 일자리를 확충하기 위한 국가의 노동시장 개입 및 통제, 다시 이러한 국가의 행위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 노동시장 개혁 재원 확보를 위한 '가혹한' 누진과세, 실질 임금의 철저한 방어와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질에 대한 노동측의 규정, 노동시장의 성별간 모순에 대한 해결책, 새로운 여가시간의 정치적-문화적 전유 등등이 덧붙여져야 한다. 말하자면 노동시간 단축 요구는 일종의 '고구마 뿌리'식 강령이기 때문에 그토록 중요한 것이며, 역으로 진정 '고구마 뿌리'식으로 그렇게 다른 정치적 각성의 요구들을 수반할 때만이 우리에게 의미있을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노동시간 단축 요구를 새로운 사회상과 연결시켜야 할 보다 근본적인 과제가 주어져 있다. 여기서 굳이 맑스의 이상이 이미 그러한 것이었다는 사실(Grundrisse)을 상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에도 다분히 이론적인 수준에서의 노동시간 단축 논의는 존재했다. 문제는 이것과 현재의 대(對)위기 요구안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의 이론적 논의는 새로운 사회상의 대중적 전파, 요구안으로서의 구체화 등을 이루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현재의 요구안은 다분히 수세적인 도구적 구호로서 돌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 진보진영에 만연한 이론-실천 사이의 심각한 괴리의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다음의 번역물은 이에 대한 벌충의 수단으로서는 지극히 미약한 것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해외 사례 소개들중에서는 가장 쉽게 읽힐 수 있는 편에 속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위안을 얻는다. 비교적 상세한 문헌 소개를 단 것은,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의 공동 연구, 논의, 실천을 서두르자는 분발의 의미에서이다.

 

● 더 읽어보기

 

[내려받기]
유럽에서의 주당 노동시간 단축 . . . 미셸 뒤퐁
이탈리아 : 압력을 계속 높이기 . . . 지아리니 리가치
프랑스 : 이보 전진, 일보 후퇴 . . . 미셸 위송
독일 : 헬무트 콜에게 조기퇴직을 . . . 앙겔라 클라인
노동시장 개혁에 대한 우리의 방안 . . . 프랑수아 베르까맹

[앞으로]


맑스주의와 환경문제
- 생산 비판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환경적 합리성으로

엔리케 레프 (Enrique Leff)

 

IMF 사태 '이후'에 환경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치 사치처럼 들린다. 이는 분명 '경제'와 '환경' 사이의 숙명의 제로-섬 게임 탓이지만, 정작 문제는 이 제로-섬 게임이 부르주아 문명의 산물일뿐이지 우리의 것은 아님을, 즉 저 '경제'라는 것이 우리 편에서의 현실은 아님을 분명히 하지 못한 진보세력의 오류에 있다. 물론 {한겨레}의 조홍섭 기자나 강수돌 교수처럼 자본 축적의 위기를 새로운 생태적 생산-재생산 패러다임으로 나아가는 변혁의 기회로 전화시키자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 목소리는 어쩐지 수줍고 자신없는 것으로만 들린다.

여기 소개하는 E. 레프는 멕시코의 생태적 맑스주의자로서, 바로 이와 같은 궁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논자라고 할 수 있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의 일관된 논지는, 생산이라는 개념 자체를 생태적으로 전화해야 하며 역으로 이 생산이라는 개념 안에 자연과 문화 등의 요인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 압축적인 명제들로 구성된 아래의 글만으로는 이 주장의 함의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레프가 우리와 같은 반(半)주변부의 생태적 좌파라는 점, 따라서 서구의 생태적 좌파처럼 '발전'과 '환경'을 대당시킨 뒤 후자를 선택하는 식의 태도를 보일 수는 없다는 점, 결국 생태적 문제의식을 '발전'이라는 말 안에 성공적으로 통합하는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그의 주장의 의의가 보다 쉽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주변부적 문제의식이 오히려 그를 서구의 생태적 맑스주의자들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도록 만든다. 민중들의 참여에 의한 친환경적인 산업구조의 구성이야말로 제 3세계의 적-녹동맹적 대안임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그는 생태주의와 역사유물론의 만남이 무엇보다도 사회의 생산-재생산 구조의 생태적 재구성에 기반해야 함을 강조하게 된다. 이 때 '녹'의 문제는, IMF 구제금융 따위와는 거리가 먼 배부른 자들의 쟁점이거나 빈자들의 운동의 '외부 요인'인 것이 아니라, 자본축적 중심적 경제 체계의 민중적 재구성이라는 애초의 역사유물론 문제의식의 '내부'에 자리잡아야 할 무엇이 된다.

최근의 저서(Green Production: Toward an Environmental Rationality, Guilford Press, 1995.)에서 레프는 자국 멕시코를 위한 대안적 생산-재생산 패러다임으로서 마야 인디오들의 전통적 농작 기술에 기반한 열대 농업의 육성을 주장하고 있다. 레프가 보기에, 선진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적 세계기술체계 안에서 반주변부가 차지할 수 있는 위치란 끝없는 구제금융의 대상이 되거나 마퀼라도라에 합류하거나 하는 것뿐이다. 오직 그러한 기술체계를 한 사슬로 하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해 민중적-생태적인 독자성을 추구할 때에만 반주변부의 민중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이론은 사파티스타류의 새로운 변혁운동을 위한 대안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며, 반주변부 변혁사상과 생태주의의 적절한 변증법적 종합의 사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멕시코와는 달리 변변한 천연자원 하나 없는 온대국가의 우리 민중들에게는 어떤 대안이 가능한 것인가? 현대자동차의 구조조정을 둘러싼 싸움을 보면서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고민이 현재의 위기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님을 확인할 수는 있다. 자동차 산업이 세계적인 과잉생산 상태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산업이 세계적인 핵심 자본축적 부문중 가장 반환경적인 것들의 하나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리해고 반대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의 당장의 요구는, 어떤 근본적 대안을 동반하지 못할 경우, 장기적으로 두 개의 덫에 빠질 수 있다. 하나는 노동자들의 기술과 공장 생산라인이 자동차 생산에 맞추어져 있을 경우 사실 지배적인 경제적 합리성에 들어맞는 것은 인원감축 중심의 구조조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중국 및 인도 시장을 겨냥하여 한국의 자동차 생산 라인을 사들인 외국 자동차 회사들 덕분에, 혹은 그와 비슷한 탈출구를 스스로 찾아낸 한국의 자동차 자본 덕분에 고용이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지구라는 별을 더욱 심각한 환경 재앙에 빠뜨리면서 얻는 연명(延命) 행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레프식의 해답은 기술의 실질적인 주체인 과학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이 현재의 생산라인을 전유하여 자본의 통제가 아닌 민중들의 합의에 따라 자동차 이외의 대안적인 생산물을 생산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현존 생산라인의 대안적 활용, 그리고 새로운 생산품들의 생산에 기반한 경제 체계의 재구성 등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적-녹의 과제가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만남 따위의 수사의 반복이 아니라, 선진국의 유연화 기술 체계가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또다른 진화주의가 아니라, 이렇게 생태적 관심을 역사유물론과 노동운동에 '내부화'하는 것만이 적-녹연대라는 그 말에 가장 합당한 것이다.

덧붙여 소개하면, 아래의 글이 영역, 수록되어 있는 Capitalism, Nature, Socialism은 국내에도 일정하게 소개된 정치생태학자인 제임스 오코너(J. O'Connor)가 주도하는 생태 맑스주의 계간지이다.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 맑스주의를 나누는 따위의 쓸데없는 논의로 시간을 허비한 국내의 적-녹 담론들과는 달리, 이 잡지는 현재 역사유물론의 생태적 재구성에서부터 구체적인 대안 강령의 구성, 적-녹운동 사례 연구, 생태적 문학 비평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탄탄한 이론적-실천적 장을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 계속 이 잡지 지상의 흥미롭고 유익한 논의들을 소개할 것을 약속드린다.

[내려받기] [앞으로]


비판적 맑스주의에서 자기해방의 중심성

미셸 뢰비

 

이 에세이는 미셸 바칼루리스(Michel Vakaloulis)와 장-마리 벵상(Jean-Marie Vincent) 편집의 Marx Apr s les Marximes. Tome I: Marx a la question (Paris and Montreal: L'Harmattan, Inc.)에 처음 게재되었다. John Marot가 Against the Current(이하 ATC)지를 위해 이 글을 영역했고 ATC지 편집진이 다시 약간의 손질을 가했다. 미셸 뢰비는 맑스주의 이론 및 철학에 대한 많은 저작들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해방신학에 대한 저서인 War of Gods (Verso, 1996)를 저술하기도 했다. 하나의 대안적 세계관, 그리고 혁명적 변화의 이론으로서 맑스주의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온 독자라면 뢰비의 논의에 흥미를 느끼리라고 생각한다.

경직화되고 부적절해진 폐쇄적이고 교조적인 체계라는 관습적인 희화화와는 대조적으로, 뢰비는 이 세계관의 개방적 특성을 강조한다.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희화화는, 자신들의 '세속 종교'(뢰비가 묘사한 바)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와 그 자유시장이 인간 역사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종국적 산물이라고 믿게 만드는 모든 이데올로기들과 사회과학들에게는 물론 쓸만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여타의 혁명 사상가들과 20세기 철학자들에 대한 뢰비의 많은 언급은 확실히 일부 독자들에게는 물론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그 자체로 더 진전된 관심과 학습을 자극하는 것이리라. - ATC지 편집자의 주

[내려받기] [앞으로]

 


대안을 향해서 : 다시읽는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

카리 폴라니-레비트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는 최근 시장의 독재에 대해 사회의 여타 제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진보적 논자들에 의해 적극적인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이중 중도 좌파 입장의 논자들은, 신자유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길은 수세적으로 '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것뿐이라는 모종의 전제 아래 폴라니를 그런 방향에서 재해석한다. 시장을 '적절히' 제어하는 국가나 여타 사회 제도들의 상 아래 말이다. 이들에게서 흔히 간과되는 것은 하이예크 등의 오스트리안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대안을 분명히 했던 폴라니의 모습이다. 여기 소개하는 그의 딸에 의한 폴라니의 초상화는 이 후자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거대한 변환}을 이미 읽은 이들에게는 보다 심화된 읽기를 권하는 뜻에서, 그리고 아직 읽지 못한 이들에게는 우선 한 번 읽어보기를 재촉하는 뜻에서 이 글을 소개한다.

칼 폴라니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출생하여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자랐다. 폴라니는 부다페스트 대학 시절(법학 전공)인 1908년, 헝가리의 자유주의적·사회주의적 문화운동을 주도한 <갈릴레이 써클 Galilei Circle>을 창립하여 초대 위원장을 맡았으며, 1924년부터 1933년까지 빈에서 {오스트리아 대중경제(Der Osterreichische Volkswirt)}를 편집하다가 파시즘에 의해 추방되어 영국으로 이주하고 노동자교육협회(Worker's Educational Association의 강사 등으로 활약하였다. 폴라니는 1940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미국 베닝턴 대학에서 체재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주저인 {거대한 변환: 우리 시대의 정치적·경제적 기원(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1944년 초판, 1957년 제2판 출간)이 이때에 저술되었다. 그후 잠시 영국으로 나왔던 그는 1947년부터 미국 컬럼비아(Columbia)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일반 경제사'를 강의한 후, 1953년 66세로 교직을 떠난 뒤 작고할 때까지 정력적인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말년에 {공존 Co-Existence}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는데, {공존}은 정치학과 경제학의 비교연구를 위한 학제적 잡지로서 "인간 조건의 불변성과 문화적 차이의 실체에 대한 지식을 통해 세계 평화에 헌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내려받기]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