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꺼리


엄습하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 신자유주의에서 공황으로?

로버트 브레너

 

우리가 초유의 경제위기를 맞아 이를 분석할 진보 이론의 무기를 찾으며 애태우고 있을 때 New Left Review는 뜻밖에도 그 229호(1998년 5/6월호)를 세계적 경제위기의 뿌리를 캐들어가는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의 한 편의 논문--270여 페이지에 이르는 글을 한 편의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면--으로 채웠다. 브레너는 봉건제-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논쟁으로 명성을 얻은 맑스주의 역사학자이며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적 정치조직인 Solidarity 그룹의 활동가인데, 이미 몇차례 경제이론 관련 글을 집필한 적이 있기 때문에--그 대표적인 것이 역시 NLR 지상을 통해 발표되었던 조절이론 비판 논문(R. 브레너, M. 글릭 [조절접근: 이론과 역사], {사회경제평론} 5호)이다--역사학자인 그가 경제이론 영역의 주제로 글을 썼다는 것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내용 자체는 일단 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NLR의 편집자 서문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 논문에서 브레너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투쟁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자본과 자본 사이의 경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브레너가 이 논문에서 주로 비판하는 대상이, 노동자들로부터의 임금상승 요구가 선진자본주의 기업들의 이윤을 압박하여 위기를 불러일으켰다는 이윤압박이론, 혹은 이를 약간 변형하여 노동자들이 전후자본주의의 고생산성-고임금 연계체계를 해체시켰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조절이론이나 사회적 축적구조론 등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아무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동학으로 계급투쟁을 제시했던 저자의 전력에 비해서는 의외의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막상 글의 내용을 정독해 들어가보면 이러한 단순 도식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풍부한 이론적 대안들이 산재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방대한 분량과 광범한 주제를 과시하는 이 논문을 전문 번역한다거나 적절히 요약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오래간만에 제출된 맑스주의적 입장에서의 경제분석을 우리말로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이 논문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두 편의 글을 번역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소개를 대신하기로 했다. 하나는 브레너 자신의 연설문으로서, 지난 여름의 파리 맑스주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것인데 브레너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Against the Current에 다시 게재되었다. 원래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의 주간 <인터내셔널 뉴스>에 국역되어 실렸던 것인데, 역자의 허락과 수정을 거쳐 여기에 다시 전재했다. 이 글에서 브레너는 NLR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그 글의 논점이 현재의 위기에 대한 우파적 분석, 혹은 개량주의 좌파적 분석에 대해 갖는 차별성과 의의를 부연하고 있다. 한편 두 번째 글은 리차드 워커(Richard Walker)라는 미국 지리학자가 브레너의 긴 논문을 요약하면서 짤막한 비평을 첨가한 것이다. 이 글만 읽어도 브레너 논문의 주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역시 ATC에 실렸던 것이다.  

아래의 글들을 보면 브레너 글의 대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므로 요약을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두 개의 이론적 지주가 전후자본주의 궤적에 대한 브레너의 구체적 서술을 지탱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는 있겠다. 그 하나가 바로 이 논문의 주장들 중에서 가장 논쟁의 여지를 지니고 있는 '장기하강의 일반이론'이다. 경쟁의 격화로 인한 이윤율의 저하가 자본의 철수에 따른 시장 균형의 재형성을 낳기는커녕 저하된 이윤율을 감내하면서 비용삭감 경쟁을 계속하는 자본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이윤율 저하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자본으로 하여금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은 대규모 고정자본 투자로 인한 경직성의 증대이다. 이는 경쟁의 격화가 특별 잉여가치의 추구를 낳고 이에 따라 기술혁신이 이루어짐으로써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고 이에 따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이루어진다는 근본주의적 맑스주의의 주장과는 배치되는 것이지만, 경쟁의 격화가 오히려 기술혁신에 의한 구조조정을 근본적으로 방해한다는 정반대의 논리를 통해서 역시 자본주의의 동학이 이윤율의 저하라는 자기모순을 초래한다는 점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맑스주의의 근본정신을 나름대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이론적 지주는 '불균등결합발전론'인데, 이를 통해 그는 각 국민경제--그 중에서도 미국, 독일, 일본이라는 세 경제대국--를 주요 행위주체로 상정한 뒤에 이들 국민경제 사이의 경쟁이 계속해서 세계경제의 의도되지 않은 모순적 결과를 야기함을 보여준다. 그가 펼쳐보이는 그림은, 마찬가지로 불균등결합발전론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특정한 형태로 전개하는 세계체제론을 연상케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의 자기모순과 전후 후발산업국가들의 지속적 도전을 역동적으로 그려보임으로써 세계체제론보다 훨씬 더 그럼직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 중 하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통화체계,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경제정책 등이 차지하는 중층결정적 역할이다.

이러한 두 가지 지주에 의지하는 전후자본주의사의 서술이 기존의 자본주의 비판에 대해 갖는 주목할만한 차이점은 한둘이 아니다. 이윤율 저하의 원인을 임금압박이나 생산성 위기, 기술혁신 등에서 찾지 않고 한정된 시장을 놓고 벌이는 주요 자본주의 행위자들 사이의 경쟁의 격화에서 찾는 것, 자본주의 시장에 대해 일체의 균형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 국민국가를 주요 경제행위주체로 상정함으로써 지구화와 초국적 기업에 대한 다소 과장어린 분석들을 미리부터 기각하는 것 등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들일 뿐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대로 이에 대한 중도 좌파 경제학자들, 그리고 맑스주의쪽의 비판이 없을 수 없다. 아직은 만델 계열 트로츠키주의 세력으로부터 나온 비판(Andy Kilmister, "Simply Wrong", Socialist Outlook, Issue 20. Dec. 1998)이 눈에 띨 뿐이지만, 이후 활발한 논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러한 논쟁의 촉발만으로도 브레너의 글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위의 Kilmister의 글만 보면 브레너와 같은 트로츠키주의 계열에서 나온 신랄한 비판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장기상승과 장기하강을 이야기하는 브레너의 이론적 입장은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의 장기파동을 상정하는 트로츠키-만델 전통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는데, Kilmister는 바로 그 만델의 장기파동론에 입각해서 브레너의 이론을 거의 반동적인 것이라고까지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요 논거를 보면, 일단 브레너가 사용하는 주요 범주들이 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그것을 별다른 재구성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란 점이 비판된다. 그리고 만델이 장기파동 속에서의 이윤율 부침을 설명하는 데 6개 이상의 요인을 동원하고 있는 데 반해 브레너는 시장 경쟁이라는 하나의 요인에 이의 설명을 환원시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 시장 경쟁이라는 요인은 분배상의 쟁점이므로 위기에 대한 맑스주의적 설명으로부터의 일탈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환율 등의 요인을 주요 설명변수로 제시하는 것 역시 분배상의 모순에 대한 특화로 지목된다.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결국, 브레너가 계급투쟁과 기술혁신이라는 동학을 부차화시킨 것이 주요 비판점임이 언급되고 있다.

이후의 논쟁은 전적으로 열려있는 과제이며 브레너의 논문이 벌써부터 이 시대의 정전(正典)의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소위 포스트모던의 시기에도 총체적 역사 분석 및 서술이 가능함을 세계체제론보다 더 직접적으로 맑스주의적인 입장에서 실제 보여주었다는 점은 참으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다른 맑스주의 이론들의 고유한 난점들과 비교해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가령 정통 맑스주의의 공황이론과 비교해보면, 브레너가 제시하는 장기하강의 일반이론이 일체의 균형이론에 대한 근본적 비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균형이론에 대한 역편향이라 할 수 있는 코민테른식 맑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위기론과 비교해보면, 이들 이론이 맑스의 '이윤율저하경향' 법칙의 기계적 해석이나 소련식 교조주의를 통해 '붕괴' 경향을 전제하는 데 반해, 브레너의 시도는 자본주의 경쟁에 대한 이론과 실제 분석의 결합을 통해 '상대적 정체' 경향을 논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 위기론'과는 구별되는 현대자본주의의 '상대적 정체성'에 대한 이론으로는 국내에는 김성구 교수의 국독자론이 있다.) 하지만 브레너의 이론과 보다 친화성을 갖는 것은 역시 만델의 장기파동론인데, 이 경우에도 비슷함보다는 차이가 두드러진다. {후기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의 저하에 대한 만델의 설명이 근본주의적 맑스주의의 설명과 정세적 설명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다소 절충적인 입장을 노정하면서 그 근저에는 슘페터주의적 기술변동론을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데 반해, 브레너는 장기하강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통해 적어도 가장 최근의 장기파동에 관한 한 일관되면서도 구체적인 이론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자본간 경쟁을 자본주의 모순의 중심 동력으로 상정함으로써 자본-노동간 계급투쟁을 무시했다는 비판 역시 맑스의 입장 자체로부터 쉽게 반박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맑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하 계급투쟁은 논리적으로 자본간 경쟁의 결과로 비롯되는 것이며 "자본간 경쟁--->자본/노동 계급투쟁"식의 전개를 보이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종별적 특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왜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이 곧바로 탈자본주의적 대안으로 연결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 규정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노동 계급투쟁이 자본간 경쟁에 종속된 것이라면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탈자본주의적 대안의 출발점이긴 하되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넘어선 무엇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작업장 계급투쟁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제 조류--가령 초기 아우토노미아--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문제의식을 적절히 전개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자본주의 극복의 대안은 자본과 노동의 대결 자체에 존재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체계적 모순과 자본-노동 대결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 있다고 해
야 할 것이다.

결국 브레너의 논의가 갖는 정치적 함의는 명백하다. 계급투쟁의 중심성이 전제되지 않았다는 일부 논자의 혹평과는 달리 브레너의 현존위기 분석은 이것이 생산성 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생산성 타협', 혹은 '진보적 타협'이라는 이름 아래 등장하는 일체의 신종 개량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 논거가 되어준다. 브레너를 따를 경우, 현존위기는 오히려 자본간 경쟁의 격화에서 기인한 것이며, 따라서 노동운동이 자본의 경쟁 논리를 수용해서는 그 어떤 대안도 생성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이전의 대자본 타협을 통해 형성된 노동계급의 자기한계를 극복해가며 경쟁의 격화에 따른 위기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실물화하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국제적인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향하여], {읽을꺼리} 2호
참고)쯤이 될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노동조합주의의 주창자인 킴 무디(Kim Moody)가 브레너와 같은 Solidarity 그룹의 주도적 이론가이며 활동가라는 사실은 하나의 힌트가 되어준다.

아무튼 브레너의 논문은 현시기의 역사적 중대성에 부응하는 중요성을 지니며, 우리의 진지한 논의를 요구하는 하나의 '계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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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습하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 신자유주의에서 공황으로?
. . . 로버트 브레너
자료 : 자본의 전지구적 격동 - 브레너의 글에 대하여 . . . 리처드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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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아르헨티나에서 대항헤게모니 전략

폴 G. 뷰캐넌

 

아래의 글은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효과적인 대항헤게모니 블록을 형성하는 데 계속 실패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민중운동에 대해 한 학자가 던지는 글이다. 아르헨티나와 우리 사이에는 민주화 이전 군부독재의 성격이나 노동운동의 체제내화 정도, 민중운동을 구속하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의 내용---저들의 경우 페론주의, 우리의 경우는 분단반공주의---등에서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항이 교착 상태에 빠져서 뭔가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대안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면이 있다.

이 글에서 필자인 뷰캐넌은 주로 그람시의 이론에 기반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략적 대항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그람시를 읽고 현재화하는 또하나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특히 주류 사회학의 집합행동 이론을 적절히 활용하는 실용적인 접근을 보이면서도 포스트맑스주의류의 대안없는 다원주의에 이끌리지 않고 반자본주의적 대항블록의 결집에 주목하는 점도 흥미롭다. 정당운동 등의 심층의 기반으로서 대중교육운동을 강조하는 부분도 그렇다. 특히 이 부분은 {읽을꺼리} 본호의 마이클 러스틴의 글 [18세 이후의 보통교육]과 비교해 읽으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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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이후의 보통교육 - 대학구조조정에 맞서는 좌파의 대안

마이클 러스틴

지난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담론은 다름아닌 '구조조정'이다. 비효율적인 낡은 옷을 벗기고, 유행에 걸맞는 새로운 갑옷과 병기로 무장한 경쟁력있는 자본을 만들겠다는 이 구조조정 담론은 어느새 만병통치약으로 둔갑하여 비단 경제영역뿐만 아니라 온 사회를 휘몰아치고 있다.

대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동안 백화점식으로 모든 분과를 다 갖추어 놓은 종합대학들에게 특성화를 통해 부피를 줄일 것이 요구되고 있고 그 와중에 경쟁력 향상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비실용적'인 분과가 우선적으로 희생되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을 실용적인 교육 위주로 특성화된 교육중심 대학으로 개편하겠다는 정부의 대학구조조정 방침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학구조조정의 다른 한 축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연구중심대학이다. 그 골자는 주변에서 중심으로 한국자본의경쟁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필요한 고급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10여개의 대학을 대학원교육 중심으로 개편하고 중점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정부의 대학정책이 경제적 필요와, 정권의 부족한 도덕성을 벌충하고 국민의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필요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아마도 문민정부를 자칭한 김영삼정권 때부터) 총자본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경제적 필요성 위주로 대학정책이 짜여지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흐름이 한국자본주의의 위기국면이 도래하면서 가속화된 것이 현재의 대학구조조정이다.

이처럼 자본의 입맛에 맞도록 대학을 구조조정하겠다는 발상을, 비실용적인 순수학문 분야의 대학교수들이 극력반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사실은 작년에 서울대본부가 발표한 구조조정 방침에 대해 인문대와자연대 교수들이 반대세력의 중심에 선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들은 대학구조조정 자체에 반대한다기 보다는 현대와 같은 방식으로, 다시 말해 순수학문을 비실용적이라는 이유로 홀대하는 방식으로(그리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대학의 구성원인 교수들이 소외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을 반대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물론 이 집단 내에도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순수학문을 수호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비하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이 바라는 대학의 상은 아마도 아카데믹한 전통이 살아숨쉬는 학문의 전당, 이른바 '문리대'의 전통을 잇는 상아탑으로서의 대학일 것이다.

순수학문을 희생시키면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흐름에서 가장 정치(精緻)한 논리를 펴는 이는 강내희 교수이다. 인문학(구체적으로는 영문학) 교수이자 민교협 공동의장을 맡고있는 그가 제기하는 대응전략은 '지식생산체계의 혁신'이다. 그는 현재의 구조조정이 대학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자폐적인 분과 학문체계 대신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통합학문적인 것으로 지식생산체계를 혁신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대학생들에게, '학습권'을 행사하여 현재와 같은 일방적인 흐름에 맞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맞는 이야기이다. 현재의 학문체계가 자폐적이라는 지적이나 공공성 회복 주장 모두 동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동의해 버리기에는 무언가 석연치않다. 우선 그의 주장에서는 공공성이라는 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정작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일반적인 언명 이외에는 설명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의 구조조정 열풍이, 그동안 쌓여온 대학 내의 폐쇄성 혹은 학문 내적인 문제의 폭발로 인해 생겼다기 보다는 대학 외부의 필요에 의해 강제되고 있다는 점을 곱씹어 볼 때 '지식생산체계의 혁신'이 적극적인 대응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마치 한국자본주의에 커다란 위기가 발생했을 때 관료주의나 관치금융과 같은 것들이 다 문제라는 지적은 분명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 해결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근원적 모순이나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축적양식같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대학구조조정에 대해 발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할 좌파의 대응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아쉽게도 좌파다운 대응전략은 아직 이렇다할 만한 것이 나오지 못한 것 같다. 대학의 구조조정은 학생운동만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듯한데, 몇 년째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온 학생운동 진영은 '신자유주의적 대학구조조정 반대'라는 포괄적인 규정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이고 사회운동진영과 연대할 수 있는 전략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학생운동 내에서의 대응 양상을 보면, 한편으로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적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규정만을 내릴 뿐 발딛고 선 대학사회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못하고 있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는 대학사회에 보다 천착해야한다는 미명 아래 조합주의적 정책을 만들어내는 데 치중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전자와 같이 대학 사회의 구체적 특성 및 그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대학 내에서 관철되는 독특한 방식을 무시해서도(혹은 그것에 무지해서도) 안될뿐더러, 후자와 같이 우리의 목표가 사회의 구조개혁과 연동된 (구조'조정'이 아닌) 구조'개혁'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도 안된다.

이 쯤에서 한동안 대학사회에서 회자되던 '68혁명' 그리고 학생운동사의 교훈을 다시금 떠올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두가지에서 '대학의 혁명은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대학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 동시대인들과 함께 호흡했을 때 학생운동은 활력을 얻었다'는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제 이 두 교훈을 접합시켜 새로운 무기를 벼려내야 하는 것이다.

아래에 소개된 러스틴의 글은 이를 위한 우리의 작업에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80년대 중반에 씌여진 이 글에서, 러스틴은 전후 노동당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교육체계를 파괴하는 대처 정부의 방침에 맞서 좌파가 취해야할 전략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적인 대처의 정책이 대학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자유주의적인 전문가 집단과 손을 잡고 좌파가 기존에 확립한 대학교육 제도를 파괴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에게 안정적인 자리를 제공해 준 대학 및 학위제도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한 전후 타협의 일환으로 노동당 정부가 확립한 교육제도들 역시 영국 대학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의 토대를 침식하지 못하고 단지 자유주의적인 전문가 집단에 의해 공인되는 학
위제도의 수혜범위를 넓혀 놓았을 뿐이라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그는 18세 이후 성인의 보통교육권을 보편적으로 확장하고 엘리트주의적이고 학위중심적인 교육제도 대신 평생교육을 통하여 민중의 교육수준을 높일 수 있는 교육개혁이 좌파의 대응방안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교육에서의 변혁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인 교육권을 그동안 민중에게서 박탈해온 강도높은 노동착취와 같은 다른 사회문제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대학구조조정에 대해 단지 '참여'를 보장하라는 수준을 넘어서야 하며 또한 보다 민중적이어야 한다는 언명을 넘어 원칙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대학에대한 좌파의 정책은 자본을 위한 국가경쟁력 강화 담론에 힘없이 끌려가서도 안되며, 그동안 개방대학(Open University)의 예가 보여준 것처럼 허울좋은 학위제도의 확산을 통해 지식의 위계를 고착, 강화시켜서도 안되고, 순수학문 수호라는 미명 아래 대학을 사회와 절연된 아카데믹한 곳으로 남겨두려는 시도에 동조해서도 안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현재와 같은 지식의 위계를 철폐하고 민중의 자기교육을 가능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제도의 변혁, 그리고 그를 통한 민중의 지적수준 향상과 지식의 민중적 재구성이다. 이제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한 대학구조조정이라는 저들의 공공성 담론에 맞서, 노동조합에 의한 대학교육이나 좌파지식인들에 의한 민중교육이라는 우리의 공공성을 내세우자. 그를 위해 대학의 문제를 대학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운동 전체의 문제로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며, 비판적 대학생들 역시 스스로를 대학 내에 가두지 말고 자기 지역의 민중의 당면한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실천틀을 만들어야 한다. '과학상점운동'의 사례도 한 전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구조조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학은 열려진 전장(戰場)으로 우리 앞에 다시 등장해야 한다. 그를 위한 실천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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