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68혁명 이후 한 세대

 

1. 신화 허물기

1) 순환의 시간, 진보의 시간

한 사건을 10년 단위로 기념하는 것은 원래 부르주아의 관습이다. 더 이상 새로운 사건의 출현을 감당할 수 없는 부르주아 문명은 과거의 사건들의 순환적 기념일을 추도함으로써 "더 이상의 역사는 없다"는 그 오래된 트릭을 써먹는다. 세계는 이제 프랑스대혁명의 몇주년, 혹은 68년의 몇주년을 기념할 수 있을뿐이라는 것은 결국 더 이상의 대사건은 없다는 후쿠야마의 주장과 잇닿는다.

68년을 다루는 우리의 관점 역시 그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 30주년이라는 의미에서 누군가 해야 할 기념의식을 준비하는 것일 수는 없다. 이는 차라리 초혼(招魂)이어야 한다. 다 해결되지 못한 그 과제를 바로 현재의 위기와 연결시켜 재수행하는 것, 이것만이 68년을 다루는 우리의 시각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새로운 미래로 달려가는 현재만이 이 경우에는 우리의 관심의 중심이어야 한다. 과거를 다루는 방법론의 기반으로서 이는 차라리 역설적이지만.

68년을 이야기하면서 사회과학 방법론으로서의 시간-철학적 기반을 논하는 것은, 이제는 68년보다도 더 긴급한 특집의 이슈로 우리에게 다가온 어떤 사건 때문이다. 그것은 남한경제의 위기와 IMF 사태이다. 바로 그 전날까지 기든스와 들뢰즈/가타리를 논하던 이들이 무슨 급작스러운 성령강림이라도 경험한 듯이 이제 자신들의 과거의 요람으로, 종속이론으로, 국가론으로 회귀하고 있다. 문화주의적 세태를 못마땅해하던 우리는 이제 우리의 경고가 올바랐다고 박수를 쳐야 하나? 문제는 다시 한번 반성의 불철저함에 있다.

우리 자신 1998년의 의미를 1968년의 30주년이라는 점에서 찾았던 것을 슬쩍 넘어가선 안될 것이다. 우리 역시 부르조아의 그 순환적 시간관 안에 얽매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환적 시간관은 모종의 단선적 발전의 시간관과 다시 얽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일단 몇 개의 분절점을 설정한 뒤에 그 분절점에 기반하여 단선적 발전의 몇 개의 단계를 나누고, 그 이후의 모든 시간을 그 단계 안의 동질의 시간대로 규정하는 것은,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일상적인 순환적 시간관의 근저에 놓인 심층의 패러다임이다. 즉 순환적 시간관은 단선적 발전의 시간관의 일상적 표현에 다름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빠져있던 것은 어떤 저주받은 시간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적-유사 헤겔주의적 시간관이다. 이 시간관 안에서 1968년은 '새로운' 무엇들이 그로부터 시작된 어떤 분기점이다. 세계사는 이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뉘며 그 이후의 시간대 안에 있는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그 분기점적 사건을 10년이라는 햇수의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추모하는 것일뿐이다. 현재를 68년의 긴 연속으로 보든, 아니면 현재를 68년의 시각에서 하염없이 푸념하든 그것은 동일하다. 양자는 68년을 신비화한 뒤에 자신이 살아가는 그 시간을 68년의 신화에서 견지하고 단순화하고 심판한다. 우리가 월러스틴에서 발견한 가장 큰 위험성은 바로 이것이었다. 네그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조야하게는 68년을 노동운동의 몰락과 신사회운동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우리의 소위 '진보적' 사회과학자들이 그렇다. '신좌파'를 무언가 단일한 불가역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그 모든 이들이 그렇다.

1997년은 이 단 꿈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깨워 주었다. 자본주의는 다시 한번 어떤 순환의 시간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기념일의 반복이라는 달력적 순환과는 다른 어떤 심층의 순환, 위기와 운동의 순환이었다. 1968년을 추모하기 전에 우리의 1997년 1월이 도래했다. 좌파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시대를 획하는 가운데 '고전적인 것에 더 가까운' 어떤 위기가 하늘의 심판처럼 도래했다. 단선적 발전의 시간을 습격한 것은 위에서의 그것과는 또다른 순환적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벤야민적 순환의 시간이었다. 과거의 투쟁의 순간이 솟아오르고 우리는 다시금 무엇인가가 도래하는 절대적 위기의 시점에 서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자본주의가 그 쓸데 없는 삶을 연장하는 한 이러한 또다른 순환의 시간은 계속될 것이다. 이 또다른 순환의 시간이야말로 장구한 자본주의의 시간들을 비동질적인 무엇으로 만든다. 그것은 더 이상 몇 개의 분절적 계기에 의해 불가역적인 진보의 대로를 밟는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세계사적 시간이 송두리채 부정되는 어떤 시간들이 채 그 근저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듯 비껴가며 반복되는 '출구'의 느닷없는 도래의 반복들이다. 이러한 시간관에 기초할 때에만 우린 늘 깨어 있어야 함을 자각할 수 있다. 그 어떤 '진보'의 담론, 심지어는 세기말의 문화주의의 형태로까지 나타나는 '진보'의 담론에 대해 우리의 '혁명'적 사고를 부둥켜주는 것은 이러한 시간관, 역사관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그 때에만 "양쪽으로 타 들어가는 촛불(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적 표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위기의 순환적 시간관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진보의 시간관을 전제한다. 이 경우 진보는 결코 자동적인 무엇이 아니라 '역사로부터의 구원', 인류의 지긋지긋한 전사(前史)를 끝맺는 어떤 도약이다. 세계 자본주의에서 세계 사회주의에 이르는 그 참다운 진보를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린 세속의 진보관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1997년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고 바로 이러한 뒤늦은 깨달음의 견지에서 우리의 1968년 특집도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2) 신좌파와 68혁명

우선 무엇보다도 현재의 위기의 견지에서, '마지막 위기(the last crisis)'가 아니라 '가장 최근의 위기(the latest crisis)'로서 68년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경우 우리는 68년으로부터 '신좌파'의 함의를 끌어내기보다는 현재의 위기와 연관된 그 당시의 패배의 지점들을 분명히 하는 것에 더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신좌파'의 불가역적 함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그 당시 '출구'의 도래에 대해 단지 반정도의 깊이로만 접근했던 어떤 오류들의 집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긍정성 또한 존재한다. 모든 경험된 위기들은 또한 나름의 진리지점들을 산출하므로. 그러나 그것이 68년 '이후'의 우리라는 정체성의 확정적 기반일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가설적으로 신좌파라는 말과 68운동 사이의 차별성을 분명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좌파'가 68운동과 우리가 생각했던 것 만큼의 유기적 연관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어떤 불가역적 함의로서의 '신좌파'는 스탈린주의의 국가사회주의적 실천에 대한 반성으로서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분명히 68운동 때문에 생성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1950년대 스탈린주의의 모순에 대한 좌파 지성들의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델 등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 재개, 영국 '신좌파'들과 프랑스의 사르트르, 알튀세주의자들, 독일에서 비판이론의 르네상스, 그람시 문헌연구의 출발, 소련 노선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이었던 제 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등장 등이 바로 그 예증들이다. 이들에게 68년은 오히려 "외재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는 1930년대의 경험들에 대한 뒤늦은 이론적 정리, 정치노선적 반추의 산물들이었다. 반파쇼 통일전선을 놓고 잠재적으로 존재했던 코민테른적 노선과 非코민테른적-反코민테른적 경향 사이의 대립이 사후적으로 현재화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좌파'에게는 분명히 긍정점이 많았다.

그러나 68운동 그것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출현한 정치사조들은 어떠했는가? 일단 가설적으로 "포디즘적 자본주의에 대한 즉자적 반대"라는 맥락에서 이들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포디즘적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그 점만은 아니다. 이는 이미 많은 논자들에 의해 강조된 바이다. 실제로 경제적-정치적 수준에서 포디즘적 축적-조절체제와 미국-소련 헤게모니하의 세계체제의 모순들이 곳곳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문제는 '즉자적'이라는 말에 있다. 알튀세주의 진영에서 68년 이후에 제시한 어떤 지형학, 즉 동일시-반동일시-역동일시의 지형학이 이 문제의 이해에 긴요하다. 68의 이데올로기는 포디즘적 자본주의에 대한 즉자적 반대, 즉 역동일시가 아닌 반동일시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이데올로기가 사후적으로 자생성주의, 개인주의(personalism), 초자유주의 등으로 정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포디즘적 축적체제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은 자본주의 전체를 극복할 대안적 주체성의 고양으로 연결되기보다는 기존의 주체성에 대한 반동일시의 확산으로 귀결되었다. 노동현장에서의 투쟁이 이것의 자생적 분출이었다면 학생운동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정파들은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선도하고 정제했다. 물론 이들의 새로운 이념이 일종의 반동일시인 한 그것은 다시 동일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초자유주의로부터 다시 초스탈린주의적 테러리즘을 향해 동요했던 것 역시 이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견지에서 최근 '탈주'의 철학자들은 68의 '서자'가 아니라 분명히 그 '적자'이다. 신좌파의 적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인 신좌파들은 오히려 68에 의해서 비껴졌다는 점을 주목하라. 영국의 신좌파--그 1세대뿐만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적이었던 그 2세대도--는, 프랑스의 알튀세주의자들은, 독일의 비판이론가들은 모두 그 운동의 중심에 서 있지는 않았다.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벌써부터 그 운동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비판이 이들이 애초에 비판했던 스탈린주의의 반복으로서 일종의 국가주의적 비판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비판을 당시의 "즉자적" 비판들에 대한 "정당한" 자기-비판이었다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68의 이데올로기들, 즉 포디즘에 대한 즉자적 비판은 말하자면 포디즘에 대한 反자본주의적 출구가 아니라 포디즘을 극복한 또다른 자본주의의 시작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68이라는, 위기의 다시 한 번의 도래를 시대에 대한 보다 분명한 실천 의식으로 접합하는 것이었다. 이를 그나마 가장 분명히 이해했던 것은 68운동 이전에 신좌파적 조짐들이 존재했던 나라들에서였다. 미국에서 운동이 가장 형해화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68년 운동을 통해 분출한 이데올로기들이 이후에 갖가지 형태의 '포스트' 포디즘들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68이데올로기의 '순수한' 대변자들중 하나인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주의자들이 가장 분명히 고백하고 있는 바이다. 어셈블리 라인 노동에 대한 거부는 노동의 유연화의 기반이 되었고, 개인주의적 주체성의 고양은 복지국가 체계에 대한 반대로 연결되었다. 1970년대의 세계공황 가운데 상황을 주도한 것은 68운동으로부터 비롯된 정파들도 아니었고 보다 분명한 자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여전히 학문집단에 불과했던 신좌파 지식인들도 아니었다. 바로 신우파였고 이들의 수동혁명이었다. 그 수동혁명을 통해 생산된 것이 바로 현재의 포스트포디즘-신자유주의 국면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좌파의 시작이 68년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적의 시작이 오히려 68년인 셈이다. 아무튼 자생적 운동들을 통해 형성된 기반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은 적들이었다. 프랑스의 68운동이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소비자본주의의 확산 요구였을지도 모른다는 레지 드브레의 지적은 바로 이런 부분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98년에 우리가 새로운 세계적 투쟁의 고양을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68의 긍정이 아니라 그것의 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3) 동북아시아의 맥락

무엇보다도 68의 경험이 동북아시아로 제한될 때 우리의 비판은 더욱 첨예화되어야 한다. 1968년 운동의 한 시작이 바로 베트남 전쟁과 중국 문화대혁명인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일본의 학생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동안 우리의 논의에서 이들 나라가 제외되었던 것은 차라리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포스트-68이 신화화된 68년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이 바로 중국과 일본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 두 나라로 대표되는 동북아시아 진영이 다른 그 어느 지역보다도 더 새로운 자본주의의 모순이 부각되고 있는데도 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 같은 대안적 주체들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대체로 68년과는 별 상관이 없는 한국이나 필리핀, 인도 등에나 약간의 좌파 주체들이 존재하는 형편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68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68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의 안보투쟁에서의 비판적 시민사회 세력의 패배가 동북아시아에서의 국가자본주의 발전 국면의 시작의 한 신호였다는 이병천 교수의 지적은 비록 단편적이지만 아주 주목할만한 것이다. 이것은 이후 미제국주의의 헤게모니와 일본 자본의 직,간접적 확대를 통해 형성된 동북아시아 국가자본주의권의 형성의 동학에 대해 뭔가 힌트를 준다. 거기에는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적 주체였던 일본 좌파의 장기적 몰락이 자리잡고 있다. 그 몰락의 가장 극적인 단락은 안보투쟁의 패배와 60년대말-70년대초 전공투 투쟁의 부패화였다. 그 이후 일본의 시민사회는 오히려 전공투 투쟁을 통해 형성된 초자유주의적 주체성의 "우경적" 전개를 통해 비정치화와 윤리적 허무주의의 극단에 처해 있다. 이것이 단지 일본 열도의 방향상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민중의 전망부재로까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

중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문화대혁명의 공허 뒤에 헤게모니를 확보한 것은 유소기 노선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적'인 등소평 노선이었다. 그 이후 중국의 행보는 그들의 공식 이데올로기인 '시장 사회주의'보다 우경한 개발 자본주의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중국의 행태가 또한 동아시아에서의 대안부재와 연결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중국 공산당 안에 어떤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맑스주의 경향이 존재한다면, 혹은 중국에 폴란드 연대노조 형태의 대중운동 세력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외롭지도 않을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의 68의 실패 역시도 결국은 동북아시아의 기존 체제에 대한 반동일시적 저항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일본에서 그것은 좌파 한 세대의 소비자본주의로의 편입을 통해, 그리고 중국에서 그것은 문화대혁명의 폐허 위에서 자본주의적 발전노선이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국과 같은 경우 유교문화 부활론, 유교자본주의론 따위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동북아시아에서 우리는 68의 영광의 여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68의 패배의 여진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한국 노동계급이 어떤 대안적 주체라면 오히려 동북아시아에서 68을 경험하지 않은 주체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제 와서 68에 대한 뒤늦은 신화화를 꿈꾸는 한국 학생운동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4) '신좌파' 주체의 새로운 형성

이상의 논의는 68운동에 대해 너무 폄하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대로 68의 경험이 완전히 마이너스였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위기의 연장선상 바로 그 견지에서만 그것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68운동의 긍정점을 말한다면 이는 학생운동이나 새로운 주체에 대한 단선적 발전의 사상 따위가 아니라 민중의 다양성, 혹은 다양한 주체성에 대한 확인에 있을 것이다. 여성, 농민, 제 3세계 민중, 비백인 제 인종 등등의 주체성이 민중운동의 시야 안에 당당히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부터였다. 어떤 점에서 이는 부정적 측면의 출발로 매도되기도 했다. 즉 정체성의 정치의 출발점으로.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동안은 단지 당위적으로만 노동계급 통일성의 구성이 이야기되었다면 이제 이렇게 다양한 주체성이 확인된 뒤에는 오히려 실질적인 통일의 확보가 보다 구체적으로 가능하게 될 수 있다. 즉 새롭고 보다 유기적인 통일을 위해서는 차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의 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고 생태운동이 68운동과는 다소 분리된 나름의 싸이클을 통해 진행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68운동의 적자(嫡子)가 여성운동, 혹은 좌파적 여성운동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새로운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을 이야기하는 많은 논자들이 강조하는 바는 여성이나 제 3세계 민중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능력과 사명에 대한 것이다. 생태계-여성-제 3세계의 발견, 이를 통한 노동계급의 대안적 인식의 확장, 이것만으로도, 가장 최근의 위기의 경험에도 나름대로 긍정점이 존재한다고 말할 근거는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월러스틴적 판본이든, 기든스적 판본이든, 들뢰즈/가타리적 판본이든 아무튼 어떤 형태로든 포스트-68 이데올로기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를 분석하고 그 위기의 지형 내에서 현재의 대안 주체를 구성해가는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 68년 당시의 운동 주체들의 경험은 긍정적인 참조점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참조점이 된다. 우리가 어떤 긍정적 사례로 꼽는 신좌파적 사상가들은 68운동의 자원과 맑스주의 역사의 축적된 경험을 결합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당시 68년의 주역들에 비해서는 오히려 주변적인 이들이었다. 이들이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 운동의 새로운 출발과 역동적인 통일전선의 구성이지 전세계적인 신좌파 주체, 혹은 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신화가 아니다. 대중운동의 자생적 분출을 그 자체로 상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역사적 대항블럭의 형성으로 접합시켜가는 것이 과제이다. 기존 체제에 대한 반동일시를 넘어서려면 단순한 저항의 제스쳐가 아니라 운동의 윤리 자체가 구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68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68년 다음의 다시 한 번의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패배로 점철된 그 한 세대를 따라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패배를 만회할 '다른' 실천을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이다. '신좌파'는 바로 여기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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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좌파와 대학혁명의 담론

얼마 전부터인가 남한 좌파 학운계열에서는 서구의 신좌파를 차용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왔다. 전면적으로 '신좌파' 학생운동을 표방하는 측(이를테면 "21세기 진보학생연합")뿐만 아니라, 이른바 '좌파'운동을 표방하는 노학연대 노선 측(이를테면 "대장정"그룹)조차도 68년 운동을 게걸스럽게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부문운동이나 전문운동과 같은 정책으로 제출되기도 했고, '대학혁명'이나 '발런티어', '솔리다리떼'와 같은 수사로 집약되기도 했다. 지난 몇해 동안 우리는 프랑스 5월혁명의 팜플렛을 거의 짜집기하다시피한 선거 리플렛과 자료집들을 숱하게 목격했다. 물음을 제기해볼만도 하다. 그것이 혹 좌익판 사대주의는 아닌가? 80년대의 광주와 6월항쟁과, 전대협과 한총련의 '약발'이 떨어진 것을 보충하기 위한 모종의 신화화는 아닌가? 또는, 그 정책과 수사들은 얼마나 충분하게 이해되고 차용된 것인가? 더구나, 좌파 학운의 일반적 의식수준과 실천양태는 그러한 '도입' 이후에도 왜 그다지 변화하지 않고 있는가라는.

이러한 분류가 얼마나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학운단위에서 '신좌파'적 논의를 그나마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사례는 90년 초반의 "진보학생연합"(구 진학련)의 경우로 보아야 할 듯 하다. 이들은 특히 '교육개혁'을 중요 이슈로 제기하고 '노동자 자주관리'를 소개했는데, 이 제기는 이후 학생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생활진보-대중정치 대학생모임"이 생겨났다. 이들은 앞서 구 진학련이 제기했던 교육개혁이라는 이슈를 채택했다는 점 말고도 다른 측면에서 뚜렷하게 신좌파적 성격을 띠었다. 즉 이들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미국 및 프랑스 학생운동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였던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는 언명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또 이들의 출현 직후 {여백의 질서}라는 책이 발간되게 된다. 이 책은 당시 학생운동에 상당한 파문을--이 해 연세대 총학생회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일으켰는데,[1] 이 책은 특히 70년대 초반 미국 신좌파 그룹의 문제제기를 그대로 한국사회에 적용한 것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앞의 두 조직의 제기가 이전의 '구좌파'적 논의 및 정서와 절충한 성격이 두드러졌다면, 이 책은 신좌파적 논의와 정서를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 소개했으며, 상당한 대중적 파급력도 가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부터 '환경' 및 '성'의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조직적, 공개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다. 환경운동연합이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성희롱이나 성차별의 문제를 대중적으로 거론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92-93년 전후로 부상한 '문화 논의'의 결과로 대학가에서는 영화나 음악(특히 록)을 새로운 탈출구로 삼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문화의 상품화라는 추세와의 관련성을 잠시 접어두고 본다면, 부분적으로, 이러한 현상의 바탕에는 '운동의 활로'를 60년대 이후 (특히 미국의) '반문화'에서 찾으려는 정서가 깔려있었다는 점은 보다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다른 질서" 그룹에 대해 잠시 살펴보아야할 듯하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미국 보다는 유럽(특히 프랑스) 쪽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90년 이후 몇몇 논의에서 소개되어온 '자주관리'를 이념 강령으로 채택했는가 하면, 보다 '정치적'인 측면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는 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흐름들과는 조금 구별되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교육개혁의 이슈는 '제 2대학'과 '생활도서관' 운동으로 이어졌고, 부문계열운동의 요구는 '전문운동'(대장정) 등으로 이어졌지만, 선거 정책 이상의 지속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학운 정파 중 실제로 그러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려 한 것은 "학생연대"의 반핵-환경운동이 그나마 유일한 사례로 보인다.

이후 신좌파적 논의의 동향에 대해서는 선뜻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매우 활발하면서도 다양하다. 신좌파적 논의라 했을 때, 그 안에는 '사생활의 정치'(혹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환경-성-인종 등의 이슈에 대한 제기와 더불어 '소수자 권리' 운동(특히 동성애자 인권운동), '생산자 자주관리' 이념, 반(反)권위주의('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도전, 학생회 중심적 학운에 대한 냉소까지 포함하여), '대학혁명' 및 '반문화' 운동(그리고 자신들의 활동을 명확히 '운동'이라 규정하지 않는 각종의 문예부문 활동까지 포함하여) 등 다양한 흐름들이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제기들은 조직적 체계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오히려 많은 경우 비조직적이고 비체계적, 산발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드러나는 현상만으로는 근저의 정서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게 되는 때도 있다. 또 학운 차원의 움직임뿐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의 억압을 들추어내는 활발한 이론 작업도 양적, 질적으로 부쩍 성장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흐름들을 모두 일별할 수는 없으며, 여기서는 주로 학운단위의, 그리고 특히 기존의 학운 집단이 조직적으로 신좌파적 논의를 받아들이는 경우를 이야기하려 한다. 해외 이론들의 소개, 그리고 국재 연구의 발전에 힘입어 '사생활의 정치' 담론은 양적으로 팽창했을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매우 심화되었다. 그런데 학생운동 집단이 이러한 담론을 수용하면서, 교육개혁-대학혁명을 주제어로 채택하고 다양한 영역에서의 해방을 위한 일상적 투쟁을 이슈로 제기하는데 있어, 68년 5월의 프랑스 학생봉기와 60년대 미국의 신좌파 학생운동이 갖는 상징성은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례는 이들의 활동이 장차 정치적 폭발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인식에 강력한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는 실례로 해석되고 있다--특히 프랑스 학생봉기에 대한 인식. 또 어떤 경우에는 '낡은' 맑스주의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사회비판적이며 동시에 해방의 열정을 폭발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반란'의 실례로 해석되기도 한다--특히 '발런티어' 그룹의 미국 학생운동 해석.

이들의 이러한 인식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해석이 대단히 일면적임은 지적할 수 있겠다. 우선 두 사례 모두, 베트남전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바탕에 깔려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지 불과 10여년밖에 안된 땅에서 벌어진, 미국이 직접 개입한 전쟁에서 특히 구정공세 이후 베트남 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은 당시 구미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베트남 인민들에 대한 국제주의적 연대의 정서가 매우 널리 확산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베트남전에 대한 프랑스 공산당 및 거대 노조들의 애매한 태도에 대한 비판이 특히 지식인사회 내에서 거세게 일었고, 이것이 구좌파로부터의 대중의 이반, 그리고 학생들의 폭발에 큰 역할을 하였다. 미국의 경우는 좀더 복잡했는데, 대학 내의 교육개혁이라는 이슈 보다는 종종 반전이라는 이슈가 더 압도적이었다. 또 프랑스의 경우 기존에 존재하던 (비스탈린주의적) 맑스주의 계열의 소정파들 및 지식인들이 얼마간 역할을 했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은 특히 그들의 나찌부역이라는 전력에 대한 반감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회적 특수성이 존재했다. 미국의 경우 당시의 격동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인종적 갈등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어떤 점에서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계급갈등'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은 그다지 '비폭력적'이지도 않았고, 설사 비폭력 투쟁이라 하더라도 그 바탕에는 매우 높은 수준의 결의와 투쟁력이 전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대중에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남한 학생운동 집단이 해외의 역사적 사례에 대해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가를 따지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해외의 사례를 제대로 해석하든 아니든 그것이 현실에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하고 활동을 벌여나가는 자양분이 된다면 잘못된 해석이 오히려 환영받을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집단들이 해외의 사례들에서 제기된 이슈들뿐만 아니라 그 사례 안에 존재하는 각종 활동방식들까지도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끌어쓴다는 점에서 쉽게 확인되듯이, 이들의 활동은 이 사례들에 전면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들은 이 두 해외의 사례 안에 존재했던 한계들까지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80년대 후반에 레닌의 저작이 표준 어휘집이었고, 볼셰비키의 전략과 조직모델이 남한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어야할 정언명령이었던 것의 거울상이라고나 할까.

우선 프랑스 학생봉기의 추동력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결론은 다소 유보해야할 듯 하다. 당시 운동의 동력이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 거부'였는지, 아니면 '소비자본주의에 편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애매하다. 68년 당시 이들의 활동에 대해 구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쁘띠부르조아적 투정'이지 않은가 하는 비난이 있기도 했다는 점은 한번쯤 염두에 두어볼만 하다. 그래도 이 경우, 봉기에 대한 '급진적 해석'(알랭 투렌느-정수복 류의)이 우리에게 보다 익숙하다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사례에 대한 해석에서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례를 전용하는 최근의 경우를 보면, 그 안에 존재했던 고도의 이상주의와 도덕성 및 투쟁력에 주목하기 보다는, 반문화의 쾌락주의적 성격, 일군의 비폭력주의 집단(특히 백인 중간계급 대학생운동에서의), 그리고 낭만주의적 자유주의에만 주목하고 있는 듯한 것이다. 어쨌든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 어느 경우에서나 아직까지 그에 대한 소개 및 해석이 대단히 제한적이고 일면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사생활의 정치', '정체성의 정치', 그리고 '대학(교육)개혁' 투쟁이, 우리 사회에서는 물론 서구에서도 그 이론적 급진성과는 벌도로,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전망이 부재한 교육개혁 투쟁이 결국 절망의 몸짓이 될 수밖에 없음을 86년 프랑스의 학생소요가 보여주었다는 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학운은 이러한 점들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또한 양 사례에 대한 이해에서 그것의 폭발력의 원천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만 주목할뿐 그것들이 왜 그토록 허망하게 끝맺고 말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해 두어야할 것이다.

요컨대, 프랑스 학생봉기나 미국의 신좌파 학생운동이나 모두 한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함부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신중을 요하는 일이다. 적어도 남한 학생운동 집단에서는 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또 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측면은 간과하고 자의적으로 '상징화'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짚어져야할 문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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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엇을 읽어내고 배울 것인가

이상의 비판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68년의 운동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영감의 창고이자 자극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 자원들과 교훈을 전유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68운동의 다양한 측면들뿐만 아니라 남한 운동의 맥락까지도 고려해야할 것이다. 특히 그들의 운동이 특수했던 것 만큼, 그 운동의 요소들이 우리에게 전혀 낯설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하겠다. 신좌파적 사고나 문화라는 것이 남한의 운동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생판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80년대의 운동을 송두리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68년의 이상을 향한 '사대주의'[2]로 기우는 태도는 68운동을 실패한 혁명으로만 규정하는 것 만큼이나 득이 없는 자세이다.

예컨대 남한의 80년대 운동을 서구의 '구좌파'의 그것과 등치시키기 곤란하다. 한국전쟁 이후 80년대 중순 까지는 신좌파이든 구좌파이든 좌파 일반이 정치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80년대의 '해방'이라는 관념이 협의의 물질적 해방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왜곡이다. 더욱이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세대들은 가장 커다란 신좌파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공동의 문제를 제기하고 공동의 실천을 통해 이를 해결해나가려는 태도였다. 그리고 춤패와 노래패, 문예 동아리로 얽힌 광범한 문화의 구조였다. 대자보는 자유발언(free speech) 운동이었고, 집체극 공연은 우드스탁이었으며, 구로 동맹파업은 르노 공장으로의 행진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인가. 물론 80년대 내내 환경과 성 같은 테마들은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스스로 생각하여 '의제화하기'와 '직접행동'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있었다. 적어도 80년대 말까지 대항 헤게모니의 원천이 된 것은, 전대협의 간부대오나 사회구성체 논쟁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인프라'였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실천 양태들은 권위주의 정권의 정치적 억압과 봉쇄가 강제한 것이었다. 하지만 80년대 초중반 학번들이 독립적인 학습구조와 담론의 유통구조, 민중과의 연대통로를 개척하고, 프레이리나 파농부터 알튀세르, 그람시를 섭렵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까지의 네오 맑스주의 수용이 단지 맑스-레닌주의로 가기 위한 '우회로'였다는 것은 사실 때늦은 스탈린주의의 사후 해석인 면이 있다. 헌책방에서 먼지쌓인 책들을 유심히 뒤적여 본 사람들이라면, 80년대 중반과 87년 이후, 즉 이론과 운동의 두 국면의 단절을 확연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구체논쟁 이전의 의외의 풍부한 관심사에 다소간 놀랄지도 모른다. 운동의 '과학화'는 맑스-레닌의 원전 수입을 의미했고, 그것의--소련 공산당의 역사로 걸러진 채로의--남한 사회에 대한 적용을 의미했다. 그것이 북한원전이었던 측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화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존재하지 않던 실천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급속히 퇴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상급단위의 문건을 받아먹지 않으면 운동을 조직할 능력도 할 자격도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기존에 고착된 학생회중심 사업구조와 투쟁방식은 벗어지지 않는 무거운 껍데기로 남았다.[3] 지난 2-3년에 걸친 일련의 한총련 '사태'와 이에 대한 현 학생운동의 대응은 놀랄만치 둔하고도 타성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는 아마추어적인 열정이나 창발적인 문제의식도 프로페셔널한 집요함도 보이지 않았다.

요컨대 90년대 초반의 남한은 '구좌파 없는 신좌파'의 성립이자, 스탈린주의의 뒤늦은 흥기의 여파가 낳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상황이었다고 할 것이다. 결국 68운동과 신좌파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선망의 대상이나 문화적 소비물로서가 아니라, 우리 운동의 역사와 현재로부터 재전유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토론하지 않고 조직하지 않으면서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는 없다. 여기에 모인 몇 개의 글들은 그러한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참조들일 뿐이다.

이번의 특집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 68혁명의 성격, 해석, 정치, 문화, 세대라는 소주제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드브레와 웨버의 글(1978년), 엘리(1988년), 카우프만(1990년)으로, 각각 프랑스, 독일, 미국의 이야기로 묶여져서 시차와 나라에 따른 분위기의 차이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정작 우리가 68혁명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대하여 볼 수 있는 문헌은 아주 소수이다. 그나마 절판된 백산서당 편, {프랑스 5월혁명}이 거의 유일했는데, 카치아피카스의 글은 프랑스 신좌파 운동의 성격과 함의를 비교적 풍부하게 이야기해 준다. 같이 수록된 5월운동 당시의 정치포스터들은 운동의 과정을 실감나게 전달해 준다. 설명을 달자면, 5월 18일에는 천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모든 공장과 대학들이 점거되었다. 이 소동의 기간 중에 민중작업실(Atelier Populaire)이 구성되었다. 예술학교의 교원과 학생조직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다수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판화반에 모여 반란의 첫 포스터 "공장, 대학, 노조(Usines, Universites, Union)"를 찍어냈다.

5월 16일, 대학 밖에서 온 미술학도들과 화가들 및 파업중인 노동자들은 "드골 정부에 도전하며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위대한 운동에 구체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포스터들을 생산하기 위하여 미술학교를 영원히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민중작업실의 포스터들은 익명으로 디자인되고 인쇄되었으며 무료로 배포되었다. 그것들은 바리케이드 위에서 보여졌고, 시위대의 행렬에서 들려졌으며, 프랑스 전역의 벽에 붙여졌다. 이들의 담대하고도 자극적인 메시지는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생생하다. 이들은 말했다. "민중작업실에서 생산된 포스터들은 투쟁을 위한 무기이며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 그것들의 적절한 장소는 투쟁의 한가운데, 말하자면 거리와 공장의 담벼락이다. 그것들을 장식적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부르조아의 문화공간에 전시하는 것, 또는 미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기능과 효과 어떤 것에 비추어 보아도 부당하다".[4] 그러나 이 포스터들이 거의 즉각적으로 수집가들의 수집품목이 되어 부잣집에서나 발견되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게바라와 함께 싸우기 위해 볼리비아로 향했던 것으로 유명한 레지 드브레의 글은 역자가 붙인 제목 그대로 68혁명을 '프랑스 자본주의를 더욱 견고하게 재탄생시킨' 계기로 해석한다. 당시의 행위자들은 그들이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이루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87년 노동자투쟁과 91년의 투쟁 역시 남한 자본주의를 재탄생시킨 셈인가? 당시의 열렬한 평의회공산주의자 앙리 웨버는 드브레가 놓치고 있는 점들에 대해서 '공정한' 비판을 수행한다. 그러나 드브레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구체적인 내용 보다는 어떤 비관주의의 정조가 아닐런지. 이 글은 드브레가 이후 미테랑 정부에 제3세계 자문역으로 참여하고, 매개론(mediology)에 천착하고, 드골의 전기를 쓰게 되는 맥락을 덤으로 읽게해 준다.

지오프 엘리의 글은 미국의 신좌파 잡지 Socialist Review에 100호 특집이자 68년 20주년을 맞아 "1968-Back to the Future?"라는 제하에 묶인 글 가운데 하나이다. 엘리는 68운동의 결과가 공중으로 흩어지거나 퇴락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현실 정치에서 중요한 대안 흐름을 만들어낸 사례로 APO에서 녹색당에 이르는 독일의 궤적을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에 실린 [미국 학생운동과 반문화]는 록과 마약을 포함하는 운동문화(그리고 반문화)의 양태들을 구체적인 사료와 함께 살펴본다. 60년대 저항문화의 외양만을 본 단순한 추종이나 폄하 양측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끝으로 카우프만의 글은 우리의 80년대와 90년대로 그대로 바꾸어 읽힌다. '모래시계'로 박제화된 창백한 80년대 세대와, 역사의 무게 조차도 귀찮은듯한 90년대의 세대는 서로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한 해답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나라의 68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연표를 살펴보니, 새해 벽두부터 터진 1.21사태(김신조 사건)와 1월 23일의 미국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온 나라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 여파로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4월 5일에는 고교생/대학생 전원 군사교육(교련) 실시가 결정되었다. 4월 23일에는 대한조선 노동자들이 해고반대와 인금인상 농성파업을 벌였고, 6월 16일 김수영 시인이 타계했다. 8월 24일에는 통혁당 사건이 발표되었다. 그랬구나. 그렇게 전태일과 유신의 70년대로 넘어갔었구나.


후주

[1] 결국 그 선거의 승리는 '여백의 질서' 팀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해에 공동체 학생연대 선본이 '대학혁명'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당선된 것은, 이미 그러한 신좌파적 정서와 수사의 수용이 기존 좌파 계열에까지 확산되었음을 말해준다.

[2] 조희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들어보자. "...우리의 학생운동이 일본적 코스, 서구적 코스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사의 전형을 만드는 것, 이것이 한국의 학생운동만이 갖는 중요한 유산이고 자긍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 가면 거대한 그리스 문화가 있지만 그것이 이탈리아의 자존심이 아닙니다. 그람시가 이탈리아의 자존심이에요. 한국의 빛나는 학생운동의 전통이 지금 퇴조기를 맞고 있습니다만, 어떤 점에서는 헌신적이고 견결한 학생운동이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론: 한국 학생운동의 역할과 새로운 모색], {역사비평} 1997년 겨울, p.103.)

[3] 예컨대 임지현은 독일의 빈집 점거운동을 사례로 들면서 말한다. "학생운동이 강렬하고 전투적이라고 할 때, 저는 가령 최루탄에 맞서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것이 전투적인지, 아니면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빈집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서 거기 살겠다고 외치고 그들을 쫓아내려는 경찰에 저항하던 움직임이 전투적인지, 어느 것이 더 체제에 저항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같은 글, p.81)

[4] 이상의 설명은 http://burn.ucsd.edu/paris.htm 에 따른 것이며, 포스터의 이미지들도 이 사이트에서 받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68혁명의 또 한 축이었던 상황주의자들(Situationists)의 영향도 볼 수 있다. 파리의 담벼락들에 휘갈겨졌던 가장 유명한 구호들 중 다수가 기 드보르(Guy Debord)를 핵심으로 하는 그들의 테제들로부터 나왔는데, 이를테면 "열정을 해방하라", "노동하지 말라", "죽은 시간없이 살라" 등등이 그것들이다. (피터 마샬,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현실문화연구, 1992 (부록1), pp.180-1.)

 

● 관련해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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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좌파와 1968년 5월 . . . 조지 카치아피카스
프랑스 자본주의를 재탄생시킨 68년 5월 / 드브레에 대한 답변 . . . 레지 드브레 / 앙리 웨버
68년 이후의 독일 : APO에서 녹색당까지 . . . 지오프 엘리
60년대 미국의 학생운동과 반문화 . . . 편집부
60년대의 그림자를 벗고 . . . L. A. 카우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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