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거의 1년만에 나오는 {읽을꺼리} 6호의 주제는 '생태주의'다.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냥(?) 생태주의가 아니라 '생태 사회주의(eco-socialism)'다. 문순홍이 쓴 {생태위기와 녹색의 대안}이라는 책을 보면 생태 사회주의를 "사회주의와 녹색을 접합"시키려는 시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흐름으로 생태 맑스주의(eco-marxism)이 있는데, 그는 이 둘간의 차이는 "맑스주의에 대해 반생태적인 측면이 있다는 데 초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생태이론적 단초가 있다는 데 초점을 둘 것인가 하는 관점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쓰고 있다. 정리하자면, 생태 사회주의는 맑스주의에는 반생태적인 측면이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생태 맑스주의는 맑스주의에 생태이론적 단초가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문순홍의 설명에 따르자면 생태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는 우리는 맑스주의에 반생태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우리는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 맑스주의의 차이에 대해서 확실히 판단하기 어렵다. 어떻게 보면 맑스는 반생태적이었던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생태주의의 시조였던 것도 같다. 우리가 '생태 사회주의'라고 지칭한 것은 그저 막연히 "사회주의와 녹색을 접합"시키려는 흐름을 지칭한 것이다. 좀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파탄에 빠진 것 같은 사회주의를, 맑스주의를, 그리고 역사유물론을 생태주의적으로 재구성한다면 멋진 어떤 것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생태위기도 해결하고, 맑스주의의 위기도 해결하고... 이번호의 주제는 그러한 '소박한' 관심과 희망이다.

환경문제/생태위기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좌파 진영의 환경문제/생태위기에 대한 대응이 아직도 시원찮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좌파 진영 내에서의 활발한 논의를 통해 독자적인 내용을 생산하기는 커녕 우리보다 먼저 고민을 시작한 이들의 경험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거의 접해보지도 못했다. 90년대 초반에는 그래도 관련된 논의들이 조금씩 소개되었으나 언제인가부터 이런 소개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손익분기점을 맞출만한 책들이 약간은 튀는 제목으로 출판되는 정도였다. 이것마저도 요즘은 뜸한 형편이다.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는 논의들은 거의 개설서 수준이었기에 좀더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한 읽을거리가 필요했다. 생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생태 맑스주의가 '대충' 무엇인지는 소개되었지만, 사회주의와 녹색을 접합시키는 문제와 관련해서 어떤 논의들이 진행되었지, 어떤 실천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이 바로 제임스 오코너(James O'Connor)를 편집장으로 1988년 창간호가 나온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Capitalism, Nature, Socialism: 이하 CNS)>라는 잡지이다.
처음에는 비정기적으로 발행되다가 1992년부터는 200쪽이 안되는 분량의 계간지로, 영어판 외에도 프랑스어판, 스페인어판, 이태리어판 등이 발행되는 등 10년이 넘는 시기를 꾸준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잡지는 전반적으로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적-녹 연대의 구체적인 사례, 생태주의와 관련된 철학, 정치, 경제학, 역사학 등의 관련 논문들, 그리고 북 리뷰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년말까지 총 40권이 발행되었는데, 문순홍의 분류를 따르자면 '생태 맑스주의'에 해당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하긴 CNS 역시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 맑스주의를 칼로 가르듯 구분해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주의 운동이나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이라는 화두로 수렴되는 관심사를 폭넓게 모색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생태 사회주의냐, 생태 맑스주의냐 하는 것은 아직 우리 수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먼저 사회주의와 녹색의 접합에 대해 먼저 고민을 시작한 사람들의 논의와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린피스, 독일 녹색당 등의 활동에 대해 피상적인 수준의 정보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CNS는 서구 환경운동/생태주의운동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잡지이다.

만일 우리에게 더많은 역량이 있었다면 CNS 지면을 통해 진행된 더 많은 논의를 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시 생태 사회주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고, CNS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전체 논의 중 일부만을 소개하게 되었다. <읽을꺼리> 이번 호를 통해 소개되는 것은 흔히 '자본주의의 이차모순(the second condradiction of capitalism)' 논쟁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논쟁은 제임스 오코너가 CNS 창간호에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이론적 서설]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오코너의 논지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생태위기에 의해 자본의 생산조건이 악화되어 생산조건과 생산력간의 모순이 발생하고, 이 모순의 작동은 자본주의를 과소생산(underproduction) 위기에 빠트린다는 것이다. '과소생산 위기'라는 개념을 통해 오코너가 시도한 것이 쉽게 말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재구성, 혹은 확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코너가 의도했던 것은 60년대 말 이후 활발해진 환경, 여성, 평화 운동 등의 신사회운동을 맑스주의의 문제틀 안에서 설명하고, 기존의 사회운동, 즉 노동운동과의 연대를 위한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려던 것이었다.

오코너의 문제제기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CNS를 통해 관련된 논의가 계속 진행중에 있다. <읽을꺼리> 이번 호에는 1992년 유럽에서 열렸던 CNS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사미르 아민, 마이클 레보위츠, 마틴 오코너, 엔리케 레프 등의 논평과 1997년에 CNS 지면에 소개된 스튜어트 로즈원의 글을 실었다.

벨라미 포스터는 [자본주의 하에서 환경 악화의 절대적 일반 법칙]에서 일차모순과 이차모순을 축적과 환경악화의 절대적인 일반법칙이라고 해석하면서 이차모순의 존재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자본주의를 제약하는 이차모순의 가능성에는 일정정도 한계를 부여한다. 그러나 일차모순을 강화시키고 있는 이차모순의 문제 즉,

생태위기의 존재는 명백한 것이기에 노동과 환경운동의 동맹 형성을 통한 두 모순의 동시적인 공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레보위츠는 자본주의에 얼마나 많은 모순이 있다는 것이냐고 딴지를 건다. 즉, 자본주의에 여러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별자본들은 경쟁이라는 조건 속에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과잉생산(일차모순)과 과소생산(이차모순)을 불러일으키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욕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연을 규정하고 생산의 범위를 규정하는 자본의 본질이고, 결국 두가지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욕구와 인간의 욕구 간의 모순이 자본주의의 유일한 모순이며 일차모순과 이차모순은 이 한가지 모순의 두가지 형태라는 것이 [자본주의: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모순인가?]에서 레보위츠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폐기되어야 할 것은 전체자본의 무정부성인 것이다. 마틴 오코너의 글 [자본화된 자연의 체계]는 위의 두 글보다는 생태위기와 관련된 자본의 행위양태에 초점을 맞추면서 오코너의 논의를 확장한다. 그는 자본이 자연에 무제한적으로 접근하고자하며 이들 자본화되지 않은 영역을 자본화시킨다고 한다. 그는 "자연의 자본화"는 "상품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이라는 오코너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연을 이미 자본화한 상태에서 자본주의는 자연을 재생산하려는 혹은 관리하려는 전략을 취하며 자본의 [비용]외부화는 자연으로의 전가가 아니라 결국 [개별]자본의 상호침략이 된다고 얘기한다. 결국 전일화된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잇는 희망은 결국 개인주의적인 '권리'의 방어가 아니라 자본에 대한 적대로 돌려져야 한다는 당위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헤겔을 철학을 인용하는 등 무척 힘들게 읽히는 글이지만 제임스 오코너의 기왕의 논의를 크게 넘어선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이차모순의 논의의 정합성을 논의하는 것은 이 논의가 역사유물론 속에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 [역사유물론의 환경적 변형에 대한 고찰]에서 엔리케 레프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레프는 생태의 문제가 {자본}의 논의에 비어 있는 부분임을 인식하고 역사유물론의 틀 내부에 생태문제를 위치지으려는 오코너의 시도를 유의미한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이를 역사유물론에 제대로 위치짓기 위해 필요한 논의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레프의 글은 이미 <읽을꺼리> 3호에 한번 실린 바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3호에 실린 글은 이번호에 실린 글의 연장선상 혹은 확장으로 읽힌다.

다른 글들에 비해 비교적 나중에 쓰여진 스튜어트 로즈원의 글 [맑스주의, 이차모순, 그리고 사회학적 생태주의]는 특히 오코너의 정치적 전략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차모순이 오코너가 주장하는 자본에 대한 범사회적 연대투쟁의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 이론적 서설]을 주 비판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 글에서 키워드는 "위기의 텔로스"이다. 로즈원은 이차모순 즉 비용측면의 위기가 곧 자본의 위기(위기의 텔로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범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오코너의 논의는 스스로 혼동스럽거나 순진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위기의 텔로스가 기계론적으로 읽히는 단선적 투사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이는 결국 역동적인 사회세력에 대한 인식을 침식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전략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한다.

'이차모순' 논쟁과 관련된 글 이외의 두 개의 글을 '덤'으로 실었다. 하나는 테드 벤튼이 NLR 178호에 발표한 [맑스주의와 자연의 한계 -- 생태주의적 비판과 재구성]이고, 다른 하나는 벤튼의 글에 대한 비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라이너 그룬트만의 [맑스주의에 대한 생태주의의 도전]으로 NLR 187호를 통해 발표되었다. 벤튼은 역사유물론을 생태학의 일부, 즉 인간이라는 종의 생태학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주장을 펴는데, 이러한 주장을 통해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원칙적으로 생태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단, 맑스의 경제이론과 인간 종의 생태학인 역사유물론론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는 거대한 생산력 발전이 전개되고 있던 19세기의 자생적 이데올로기인 '생산력주의'에서 맑스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벤튼의 주장이다. 벤튼에 따르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노동과정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맑스주의 경제이론과 역사유물론의 간극을 메우는,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룬트만은 벤튼이 '인간중심주의'와 '환경중심주의'의 이분법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면서, 맑스 자신이 생태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논지의 주장을 전개한다. 흔히 반생태주의적이라고 이해되는 맑스의 자연관, 즉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가 '의식적인 통제'로서, 자연 환경을 고려한 장기 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룬트만에 따르자면 기존의 생태주의자들이나 벤튼은 맑스의 '의식적 통제'를 장기 합리성이 아닌 단기 합리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고, 공산주의 사회는 기술을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단기 합리성에서 기술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상태로 전환된 사회인 셈이다.

여기에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적 '공간'문제를 핵심적으로 다루어왔던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논의 역시 주목할만하다. 흥미로운 정치경제학 교과서인 {자본의 한계}에서 그는 자본주의에서 공간이 차지하는 역할과 축적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한다. 자본의 축적은 많건 적건 물리적인 사회적 하부구조를 필요로 하며 이것의 공간적·지역적 고착성에 착목하여 자본의 축적을 위한 외부화에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하비의 주장은 '비용의 압박'이라는 오코너의 논의와도 맥이 닿는 것으로 보인다.

'이차모순'을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린 건 역시 이차모순의 성격이었다. 이차모순이 오코너의 주장대로 일차모순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물적토대를 갖는 그 무엇인지, 일차모순에서 파생된 '일시적인' 모순인지 하는 것이었다. 그 성격에 따라 이차모순을 돌파하고자 하는 자본의 전략이 달라질 것이고, 자본에 대한 반자본 진영의 구성, 전략 등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미나를 거치면서 알게 된 건 우리의 능력이 많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이차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선 '일차모순'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할텐데, 우리는 일차모순에 대해서도 잘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의 계획은 이차모순 논의를 바탕으로 앞에서 짧게 소개한 하비, {자본론을 넘어서}의 레보위츠 등을 포괄해서 생태위기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통해 자본의 전일적인 지배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전선을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결과는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주의'를, 아니 '생태 사회주의'를 이번호의 주제로 삼은 것은 환경문제/생태위기는 좌파가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고, 언제나처럼 더 많은 사람들과 우리의 고민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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