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꺼리


국제적인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향하여
 

킴 무디

 

자본 주도의 사회적 조정 국면은, 언제나 자본의 승리만이 예정되어 있는, 일방통행로가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이 조정 국면은 임노동계급의 자기재구성 국면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자본} 1권에서 단지 참상과 수탈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본원적 축적/프롤레타리아화'의 수동적 그림 대신, 노동계급 대중의 자기재구성 운동이 위기를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적 단계가 아닌 역사 자체의 새로운 지평으로 전화시킬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위기 국면에서는 처음부터 자본과 타협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강신준 교수 등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의미한다.

그런데 현 국면이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 던지는 의미를 놓고 한 노조 활동가가 제기한 다음의 발언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희망의 현실적 근거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강한 비판의식의 형성과 민주노총 2기 지도력의 구성 시점이 노동계급의 자기재구성 실천을 요구하는 위기 국면과 엇물린다는 점은, 87년 이후 제 3기를 맞는 한국 노동운동이 그 제 3기의 내용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경제 대공황} 책자 이후에 컴퓨터 통신에 공개된 민노연 문서들의 긍정적인 부분들과, 전국노련 기관지 {노동전선} 1월호의 이환재, 김상복 등의 글 등은, 이미 노동운동 내에서 등장하고 있는 자기변혁의 목소리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직상의 획기적 전환의 필요성은, 이미 분출하고 있는 평조합원운동에 기반한 계급대중조직으로서 산별 노조의 구상, 하청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의 조직화, 지역별 조직의 강화, 실업자 조직의 건설 등에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더해 여성 노동자 조직, 노동계급 정치조직의 세포로서 현장 분회, 직업기술 재교육과 계급교양 교육을 아우르는 자주적 노동자 교육 기구, 민중운동 연대기구 등의 문제들이 존재한다. 이 모든 제안들을 총괄하면 결국 기존의 서구형 노조운동 모델을 넘어서서 내부에 다양한 조직 계선을 지닌 그런 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이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된다.

그리고 이런 조직상의 혁신은 진지전의 의제들인 이행기적 요구들과 이어짐으로써 자기재구성 운동의 전체상을 구성해나간다. 그것의 예증은 지역별 조직의 의의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 다음과 같은 당면 사회화 전략 제안에서 발견된다.

또한 여기에는 근본 이념의 재구성이라는 문제가 연관되며, 진실로 이를 필요로 한다. 생각해보자! 유동성을 협박 무기로 하는 현단계 자본의 움직임에 대해 지역적 통제를 확보하려면, 수익성의 숫자 놀음보다도 지역적 생활세계가 더 중요하다는 근본적 비판의식이 민중들에게 철저히 자리잡아야 한다. 이 시대에 과연 급진적인 변화가 창출될 수 있을지 회의하는 이들에게조차 이러한 근본 이념의 재구성 문제는 당면 과제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리피에츠류의 중기적인 진보적 타협이라도 가능하기 위해서는, 리피에츠 자신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듯이, 현존 체제의 제 가치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대중운동들의 이데올로기가 구성되어 적극적으로 확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민중이 '경제주의'/'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속박되어 있을 경우 위기는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의 새로운 헤게모니를 구성할 기반이 되어준다. 이는 자본주의 위기의 역설인 셈이다. 근본 이념에 기반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면 투쟁이 바로 이 기존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공격에 기반한 대중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기존 체제-기존 노동계급 조직 및 운동 형태-기존 대중 이데올로기'의 전체 블럭에 대해서는 다만 '진지전적 전략 및 요구-노동계급의 자기재구성 운동-근본 이념의 재구성 및 확산'이라는 또다른 전체적 블럭만이 현실적인 대항세력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소개하는 한 북미 노동운동 이론가의 글은 위의 모든 논점들에 대한 한 참고 자료가 되어준다. 킴 무디는 {당대비평} 2호에 실린 최근 미국 노동운동에 대한 보고, [미국 노동운동은 부활하고 있는가?]로, 국내에도 이미 낯설지 않은 논자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Labor Notes, New Politics 등의 진보 노동운동 매체를 통해 미국 및 캐나다 노동운동의 계급지향적 혁신을 위해 노력해온 인물이다. 참고로 Labor Notes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면, 우리나라의 노조 외곽 단체나 노조 내 민주파 연대조직에 해당하는 미국 노동운동 단체로서, 동명의 소식지를 발행하고 있고, 매년 전국적인 활동가 대회도 개최하고 있다. 작년 UPS 파업을 성공시킨 팀스터 노조(미국의 운수산별노조)의 론 캐리 진영을 비롯한 광범한 민주노조진영이 이 단체의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AFL-CIO의 스위지 신임 집행부가 대표하는 미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조류 내에서도 보다 계급적이고 좌익적인 분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NLR 편집자의 해설에 따르면, 아래 글은 올해 출간 예정인 그의 책 Workers in a Lean World: Unions in the International Economy, Verso, London 1997.의 일부 발췌라고 한다. 그가 제안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 노동계급의 대안은 바로 '새로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이다. 이는 이미 Peter Waters 등에 의해서 제출된 바 있는 제안인데(윤소영,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 124쪽), 국내에서는 실천 진영의 논의로까지 활발히 소개되어 있지는 않은 형편이다. 그 주장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이제까지는 소위 신사회운동들(NSMs)의 특성인 것으로 주장되어온 것들, 즉 아래로부터의 적극적 참여, 직접민주주의적 조직체계, 환경 및 여성, 인종문제 등에 대한 관심, 기존 정치체계에 종속되지 않는 능동적 정치성 등등이 바로 노동조합운동의 전세계적 재구성이라는 현 국면에서 노동운동이라는 '구'사회운동의 새로운 특성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며,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95년 총파업과 한국의 96년 총파업,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브라질 등지의 노동운동, 미국, 캐나다에서 최근 등장한 새로운 노동조합운동 흐름 등을 주요 전거로 들면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의 조짐을 실증한다. 여기서 우리의 독자들은 약간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검토하는 외국 이론가의 글에서 바로 그 우리 노동운동이 긍정적 사례로 들어지는 것을 볼 때의 느낌은 좀 양가적이다. 즉 이 글을 통해 우린 1987년 새 노동운동의 출발과 함께 등장했으나 한때 우리 자신에 의해 잊혀지고 있었던 우리 노동조합운동의 아래로부터의 투쟁 중심, 현장 대의원 및 조합원 총회 중심의 기풍의 항구적 의의를 다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 운동이 처한 재구성 국면에서, 이러한 옛 기풍의 되새김과 민주노총이라는 보다 발전된 조직에 더하여 필요할, 전 계급적이며 민중-주도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자기 재구성의 내용을,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다른 나라 동지들의 창의성 속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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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점거와 산업민주주의

주프 비서

 

자본가들의 '경영전권', 그 이전에 사유재산의 신성불가침성이라는 관념은 자본주의의 가장 굳건한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이다. 축적의 경위야 어찌되었든 사용자의 생산라인과 회사조직은 그들의 고유권한이며, 그 법적 권한 내에는 '착취를 방해받지 않을' 권한마저도 포함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무노동무임금일뿐만 아니라, 착취를 잠시 중단시키게 한 노조에게는 그만큼의 착취분이 노조재산 가압류 등속의 제도절차로 '보전'된다--혹은 그런 식으로 노조를 훈육하고 경영전권 이데올로기를 확인받으려 한다.

노동자가 직장폐쇄(lock-out)가 결정된 작업장에 들어가는 것은 불법이다. 사용자들의 이 유일한(?) 쟁의행위는 법과 경찰로 확실히 보증받는다. 물론 노동자들의 가장 큰 무기는 파업이다. 그러나 흔히 그러하듯 파업파괴분자나 대체 노동자들이 투입될때는, 항상 깡다구 노동자들의 단결로만 극복해야 할까? 이 때 노조는 피켓팅(picketing)이라는 수단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작업장 진입을 막는 것과는 반대로, 아예 작업장에서 나가기를 거부하면서 작업장 안에서 집회와 조업을 지속하는 투쟁형태가 있으니 그것이 이 글에서 고찰되고 있는 '공장점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쟁의시 공장 내 집회나 조합원 총회 같은 문화가 있지만, 파업결의는 해 놓고는 규찰대 몇 명과 조합 상근간부들만 농성장에 남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가두 행진에 참여하는 대신 집에서 쉬는 모습들이 때때로 지적되곤 한다. 80년대에 정형화된 양식인 작업장 농성도 타성화되면서 내용성과 영향력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생산중단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이렇게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도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 이런 배경에서 공장점거는 확실히 한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는 사례일 것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제기는 '경영자 없이도 생산이 가능한가'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점거자들은 '그렇다'고 이야기했으며, 봉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다른 생산의 질서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후 '자주관리'라는 구상의 연원이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잠시, 국지적으로 밀어내고 새로운 사회관계를 예시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고 또한 활용해야할 모든 행동수단 중의 하나로서, 그리고 생산과 생활의 공간에 대한 통제권이라는 측면에서, 필자가 고찰하는 다양한 수준의 사례들 살펴보도록 하자.

sit-in, stay-in, work-in 등은 번역이 곤란하여 그대로 두었다. 예컨대 sit-in의 경우 단지 '연좌농성'은 아닌 것이, 주저앉아 공간을 점유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담기 때문이다. 들어가서 무언가를 한다는 뜻의 이들 '-in'돌림 단어들은 서구의 60년대 운동이 만들어낸 신조어 시리즈로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나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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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공산당 선언>

엘렌 메익신즈 우드 외

 

맑스주의자에게 있어서 {공산당선언}을 읽는 것은 영화매니아들이 <카사블랑카>를 보는 경험에 비견되는 것이다. 이것을 익숙한 것에 대한 충격이라 부르기로 하자. 오랫동안 귀에 익은 구절(대사)이 여기, 바로 여기에서 그 최초의 기원(起源)을 드러낼 때, 우리들 맥박은 빨라진다!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를(Here's looking at you, kid)."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우리는 늘 파리를 간직하겠지요(We'll always have Paris)." 그리고 나서는, 그곳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반쯤 알고 있던 어떤 상투어가, 실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다시 한번 놀랄 것이다.(영화에선 "피아노를 쳐요, 샘(Play it, Sam)"이라고 나오지, "피아노를 다시 쳐요, 샘(Play it again, Sam)"이라고는 결코 나오지 않는 것이다.) 명성의 입증과 출처의 재확인이라는 이중의 감흥은 사실 대단한 것이다.

올해 많은 사회주의자들이--그리고 아마도 불과 몇년전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에 의해 기만당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한, 그 외의 많은 사람들까지도--올해로 출간 150주년을 맞이하는 {공산당선언}(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1848)을 다시 접함으로써 그러한 감흥을 재경험할 것이다. 그같이 오랜 세월을 견디어낸 저작은 극히 드물다.

{공산당선언} 발표 150주년을 기념하고 또 {선언}의 변함없는 의미에 다가가기 위해서, 우리는 {공산당선언}에서 시간의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구절들을 뽑아내고, 이들을 화두로 하여, 이들 화두마다 각각 우리가 특별히 적격이라 생각하는 필자들의 글들을 배치하였다. 그 결과는, 독자들도 이에 동의해주기를 소망하거니와, 150년이 경과한 맑스주의가 지닌 지속적인 타당성의 강력하고도 필연적인 표출--어떤 신앙심이나 자기만족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는, 본지의 중요한 전통을 따라, 필자들이 {선언}의 기념일을 우리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차없는 질문들을 던지는 하나의 기회로 삼도록 북돋았다. 그 질문들은, 우리가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의 실현을 내내 염원해왔던 20세기의 말엽에 이르러 우리의 전통이 반드시 답변해야 할 것들이다.

우리는 이 심포지움이 제법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 공부의 목적은--시간의 경과에 따른(as time goes by) 향수어린 정조를 부추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현실을 더욱 잘 인식하고 세계를 변혁토록 하는 데 있다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아래 글들을 싣는다.

- Christoper Phelps (ATC지 편집위원회를 대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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