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대안체제 논의의 리얼리티를 위하여

 

'재벌 해체', '경영 참여' 혹은 '경제 민주주의'와 같은 구호들은 최근 가장 인기있는 것들이다. 이는 진보진영의 각론의 심화이자, 현실정치에 개입할 있는 유력한 매개이며 과제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은 그 예봉이 아직 그다지 날카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산업 민주주의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어떤 것이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부문이나 제도인가, 경영권은 무엇으로부터 잠식해 들어갈 것인가, 기층투쟁과의 결합은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등의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겨져 있다. 이러한 논의의 부재는 종업원 주주 재벌기업(국민기업?) 기아를 살리는 와중에서 뚜렷이 드러났다--그것이 거시적인 대안체제에 대한 논의와 이어지지 않으며 실제로는 이를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어떠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체제를 가질 것인가의 문제는 기원을 따지기 조차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80년대에 그러한 물음의 구체화를 봉쇄한 것은 한편으로는 맑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아주 간략하고 이상적으로 언급했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상, 그리고 사회주의는 '모델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문구--물론 그것으로 만족해한 이들은 드물었지만--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존재하는(actually existing) 사회주의 진영이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그것이 체제와 계급의 대립이 소멸된 역사의 종말이거나 혹은 자본주의의 천년왕국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러나 비난과 다짐으로 자본의 천년왕국이 저지되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는 다시 그 묵직한 주제에 관심을 돌려야 하며, 특수하게 상정되었던 모델이 붕괴한 이후 오히려 그러한 발본적인 논의의 조건들은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그러한 논의들은 실상 전혀 원칙적이지도 발본적이지 못했다. 요컨대 그것은 '시장'과 '계획'이라는 아주 낡은 대립쌍의 문제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로서의 시장과 규범(?)으로서의 계획의 대립이었으며, 이 싸움에서 '현실'이 승리를 거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벌해체'든 '경영참여'든 이 현실의 승리를 전제하고 있다. 영국에서 이미 상품가치를 상실한 대처주의를 열심히 수입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무시킨다. 한국경제연구원에서는 자신만만하게 '자유주의 시리즈' 출판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립쌍의 관계나 시장의 승리는 과연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되짚어야 한다.

프랑스 경제학자 까뜨린느 사마리는 말한다, "누구든지 대체로 시장의 역할을 제한함으로써 전후의 장기 호황이 가능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직껏' 시장에 대한 변호가 계속 유행하고 있는데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계획되는 체제의 필요성은 동방진영 뿐 아니라 서방진영에서도--비록 다른 성격의 모순을 촉발시키는 상이한 관계(즉, 소유관계)의 맥락에서이기는 하지만--표현되었던 것이다."[1] 거의 1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지적은, 더구나 지금의 논의 지형에서는, 여전히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캘리니코스 역시 "자본주의의 역사는 또한 시장의 무정부성에 일정 형태의 사회적 규제를 부과하려는 노력들로 이루어진 역사이다"[2]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러한 점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이미 폴라니와 월러스틴[3]에 의해 주장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역시 시장의 불가피성이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이 여기서 고루할만큼 원칙적인 논의들을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안체제의 동학에 관한 제 논의를 '시장 사회주의' 논쟁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일면 내키지 않는 일인데, '시장 사회주의' 자체가 사실상 80년대 이후 사민주의적 모색과 연관된 특정한 흐름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 작동원리에 관한 논의들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대개 다섯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 랑게, 하이에크, 미제스 간의 사회주의 제 1 계산논쟁
2) 브루스, 라스키, 시크 등의 50-60년대 논의
3) 노브, 만델, 엘슨 간의 시장 사회주의 논쟁(사회주의 제 2 계산논쟁)
4) 밀러, 에스트린, 플랜트 등의 페이비언협회 그룹 내의 논의
5) 엘스터, 뫼네 등 분석 맑시스트들의 논의

이 중 1)과 2)의 논의가 사회주의 계획의 계산가능성과 실현의 기술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면, 3)은 현실 사회주의가 어느 정도 실험을 완료한 후, 사회주의 이상의 유의미성과 실현가능성에 대한 폭넓은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4)의 페이비언협회 그룹은 영국 노동당 내의 정책집단으로 자주관리 노동자 협동조합의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5)는 그와 유사한 모색을 분석맑스주의의 이론적 정치함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들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노브-만델 논쟁 이후 현재까지의 논의에 해당된다. 3)의 논쟁은 84년에 출간된 노브의 {실현가능한 사회주의 경제학}으로부터 촉발되었는데, 여기서 노브는 사회주의자들이 시장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든 좋아하든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시장에 맡겨져야 하는 부분이 존재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맑스주의 경제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만델이 NLR(New Left Review) 지면에 [사회주의 계획의 방어]를 게재하면서 서로의 답론과 반비판이 오가는 몇 년에 걸친 논쟁이 전개되었다.[4] 여기서 만델과 엘슨의 글을 소개하는 것은 NLR 지상의 논쟁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이 글들이--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이후에 동구의 몰락이라는 분기점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시장과 계획 또는 사회주의의 동학에 대한 아주 원칙적이면서도 풍부한 논제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만델의 글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은 이상적으로 상정된 사회주의의 모델이나 현실 사회주의의 모습이 아닌, 자본주의 태내에서 성숙하고 있는 조건과 모순들로부터 논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에게 오래 잊혀져 왔던 '생산의 객관적 사회화'라는 명제이다. 그는 이로부터 우리의 통념에 반하는 자본주의의 이면들, 즉 소비의 패턴들과 비공식적 사회적 협동이 이미 고착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집중화된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노브는 자신 역시 시장의 불완정성과 제한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만델은 시장과 계획, 그리고 '사전'과 '사후' 사이에 너무 명백한 선을 그어 놓고 있다고 반박했다. 노브가 보기에 '자기조절적인 연합한 생산자'라는 생각은 일국 수준에서도 하나의 유토피아적 슬로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만델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상 사회주의의 가능성과 당위성에 대한 관념임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대량실업이나 파산 없이 시장경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브의 생각은 자신의 케익을 먹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팔고자 하는 생각과 같다고 재비판한 바 있다.

이 논쟁을 볼 때, 노브와 만델의 실질적 프로그램들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만델이 트로츠키가 이행기에서의 시장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종종 강조하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만델의 논의는 시장 자체의 부정이라기 보다는 노브의 시장관에 대한 강력한 반발로 읽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양자의 전제와 지향점이며 이것은 강령과 현실정치로 구현되었을 때는 결정적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양자는 지금 시점에서는 아주 고전적인 주장이지만 이후 전개된 시장 사회주의, 또는 급진적 자주관리 논의의 기본틀로서의 함의를 담고 있다.

한편 엘슨은 시장과 관료적 계획 사이에서 대안이 존재한다는 만델의 견해와 또한 부분적으로 가격 메커니즘이 사회주의 경제의 조정을 위한 필수적인 도구라는 노브의 견해를 수용하며, 그러나 해결책은 소유권의 변화를 통한 시장의 사회화가 되어야한고 주장한다. '가계'의 중심성과 '정보 공유'에 대한 강조를 눈여겨보기 바란다. 그녀의 글을 아주 구체적이면서 또한 규범적인 미덕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엘슨의 글 중 1부는 노브와 만델 논의에 대한 검토와 비판이며 시장의 사회화를 기술하고 있는 부분은 2부인데, 여기서는 2부만을 옮겼다.)

엘슨의 구상은 드바인의 '참여적 계획 모델'과 유사한 맥락에 있음을 그 다음의 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다만과 드바인은 이제까지의 논쟁을 오스트리안 학파와 신고전학파의 패러다임 간의 대립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면서,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발견'의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들의 대안은 '시장 지배'와 '시장 교환'을 구분할 것, 그리고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협상에 의한 조정 과정에 참여하는 구체적 방안을 만드는 것이다. 원칙적 전제와 현실적 고려에 있어서 적어도 최근까지의 가장 진전된 논의를 담고 있는 듯 하다.[5]

우리는 이 논의들을 통하여 시장과 계획을 대립시키는 것 보다 그 관계와 변형의 맥락이 중요함을, 그리고 양자를 절충시켜 '현실적' 대안을 실용주의적으로 제출하는 것 보다 일관된 거시적 지향과 현실적 매개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필요함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아주 원칙적인 이야기들이라 하더라도, 솔직히 그 원칙을 이만큼이라도 풍부하게 전개하는 논의를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시장의 전횡을 제어해야 한다고 양념처럼 이야기하는 좌파 연구자들 조차도 스스로 시장에 대한 조목조목한 고발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놀라운 일이다. 이 점에서 만델이 86년의 글에서 언급한 좌파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은연중에 용인하고 따르고 있다는 '현재의 분위기'는 지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시장사회주의 논의들이 갖는 문제는 대개 실제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진지한 고려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적 시장이라는 현실을 용인하는) 이러한 관점들이 새로운 삶의 패턴이나 인간성의 고양에 대한 성찰력과 상상력을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체제에 관한 논의들이 물론 당장의 계획이나 슬로건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논의의 불필요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자. 그것은 계획과 전술 이전의 의제(agenda)이다. 그것은 원론이나 강령과 현실 정치 사이를 채우는 이론이자 이데올로기이며, 그것 없이는 어떠한 원론이나 각론도 생명력을 잃고 만다. 이는 우리가 주변에서 목도하고 있는,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 이전에 '실현 가능한 개량'으로, 결코 그 자체로는 가능하지도 않은 개량으로 추락하는 현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논의가 '리얼리티'를 획득해야 한다고 믿는다.


후주

[1] 까뜨린느 사마리, {시장, 계획, 민주주의}, 신평론, 1990, p.165.

[2] 알렉스 캘리니코스, {역사의 복수}, 백의, p.164.

[3]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이 개인의 행동에 제약을 가한다는 의미에서 틀림없이 작용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조화였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아주 기이한 해석이라 할 것이다."(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창작과비평사, p.37)

[4] 이 논쟁에 참여했던 글들은 다음과 같다. E. Mandel, "In Defence of Socialist Planning", NLR 159, 1986; "The Myth of Market Socialism", NLR 169, 1988; A. Nove, "Markets and Socialism", NLR 161, 1987; D. Elson, "Market Socialism or Socialization of the Market?", NLR 172, 1988.

[5] 시장사회주의 논자들의 방법론적 지반에 대해서는 본지의 '읽을꺼리'에 실린 존 러버링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그는 시장사회주의 이론들이 사실상 '경험적 실재론'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 관련해서 읽기

<학위 논문>



[내려받기]
사회주의 계획의 방어 . . . 에르네스트 만델
시장사회주의인가 시장의 사회화인가 . . . 다이안 엘슨
경제적 발견과 시장사회주의 - 최근의 사회주의 경제이론 . . . 피크릿 아다만 / 팻 드바인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