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와 운동 - 2



현실화되는 영국 좌파의 대동단결

 

<읽을꺼리>는 그 첫 호부터 블레어 신노동당 출현으로 인한 영국 좌파 정치지형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해왔다. 그런데, 지난 5월 블레어 지도부의 기만과 강압으로 인해 런던시장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했던 노동당 좌파의 켄 리빙스턴이 영국 역사상 최초의 직선 런던시장에 당선되면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주관적으로만 여겨졌던 영국 상황은 커다란 전환점을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블레어주의자들에 의해 노동당 대중정치의 암적 존재로 찍혀왔던 노동당 '좌파' 인사가 런던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자본주의 메트로폴리스 중 하나의 직선 시장으로 당선되었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또한, 그 와중에서 켄과 긴밀한 연합관계를 맺고 이번에 런던광역시의회에 3명의 의원을 진출시킨 녹색당의 선전도 기대 이상이다. 마지막으로는 이번 선거에 대한 대응을 계기로, 그 동안 특유의 종파주의 전통에 얽매어 있던 영국의 사회주의 정파들이 런던사회주의연합(LSA)이라는 형태로 거대한 실험을 시작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LSA는 스코틀랜드사회주의당(SSP) 건설이라는 결실을 낳은 스코틀랜드사회주의연합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사실은 작년의 유럽의회 선거 때도 이 이름으로 좌파 공동투쟁을 벌인 바 있었다. 하지만, 유럽의회 선거 이후 한동안 정체 상태에 있다가 이번에 리빙스턴의 무소속 출마로 인한 노동당 정치의 위기를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LSA에 참여한 정치세력은, 우리나라에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으로 잘 알려진 신트로츠키주의 입장의 사회주의노동자당, 그리고 이전에 '밀리턴트'라는 이름으로 노동당 내에서 활동하다가 블레어가 등장하면서 탈당하여 독자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정통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사회주의당(SSP는 이 경향의 스코틀랜드 지부가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 만든 것이다), 고(故) E. 만델의 제 4인터내셔널을 따르는 또 다른 신트로츠키주의 입장의 국제사회주의 그룹(IS와는 상관없으며, Socialist Outlook이라는 월간지를 낸다), 역시 트로츠키주의계인 노동자자유연합과 노동자권력 그룹, 그리고 마오주의 경향의 대영공산당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 존 필저, 켄 로치, 타리크 알리 같은 좌파의 저명인사들이 LSA를 지지했으며, <읽을꺼리> 1호에서 소개·번역한 노동당 분석 논문([새 노동당과 그 불만들])의 저자인 마이크 마크시(Labour Left Briefing의 편집위원이며 스포츠사회학자)도 이번에 최종적으로 노동당을 이탈하여 LSA를 지지했다. LSA는 선거 후 곧 깨지리라는 일부의 전망과는 달리 6월 22일의 토텐햄 보선에 웨이먼 베넷(Weyman Bennett)을 후보로 출마시켜 계속 공동투쟁을 벌이고 있다.  

런던시장 선거가 끝나고 나서 리빙스턴, 녹색당, LSA 등의 결코 실망스럽지 않은 성과는 노동당 왼쪽의 좌파 대중정당을 건설하자는 제안을 더 이상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않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과거부터 이러한 구상의 적극적인 주창자였던 힐러리 웨인라이트의 월간 Red Pepper를 중심으로 독자 좌파정당 건설 논의가 시작됐다. 우리가 진보정치의 전 세계적 화두라고 생각해온 '새로운 포괄적 정당(new inclusive party)'이 이 오래된 나라에서도 드디어 현실 의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움직임을 '블레어주의'의 좌파 판본일 뿐이라고 혹평한다. <현장에서 미래를> 2000년 6월호에 실린 글에서 원영수는, 아침에는 반자본주의를 외치다가 저녁에는 기업가들과 만나는 켄 리빙스턴을 지지한 LSA의 정치적 허약성을 비판하고, 노동당과 녹색당에 두루 손을 뻗치는 리빙스턴의 '초당파 정치'를 블레어주의의 연장일 뿐이라고 분석한다. 이러한 평가는 마음에 썩 들어맞지 않는 정치 경향을 하나 하나 지워가며 끊임없이 왼쪽으로 경도되는 최근 우리나라의 어떤 정치 경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영국에서 LSA가 극복해나가고 있는 '과거'가 바로 이러한 것이라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미래'의 길로 생각하는 딱한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유아적인 기준 속에서 이상적인 좌파 세력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의 균열의 계기들을 주목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대중정치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영국에서 지금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아무튼 리빙스턴의 런던시장 당선이 열어놓은 새로운 정치지형이 영국 좌파의 절호의 기회라면, 이는 세계 다른 곳의 진보세력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이에, LSA의 활동과 관련한 보고와, 최근의 좌파 대중정당 건설 논의를 여기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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