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꺼리


근본주의도 '신 실재론'도 아닌
- 사회주의 이론의 현재 조류들에 관한 비판적 실재론의 조망

존 러버링

 

소련식 '유물변증법'의 퇴조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철학적 대안은 세가지 정도였던 것 같다. 우선, 변증법이라는 개념적 도구, 방법론, 또는 학습영역(?)을 포기하지는 않되, 다만 좀 더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습득하려는 시도--그래서 J. 이스라엘이나 K. 코직의 책을 보았다--가 있었으나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그 다음으로 쿤, 라카토스 등을 경유하여 맑스주의를 과학철학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주로 자연과학으로부터 발전한 과학철학의 지반이 사회이론으로 확장되는 징검다리는 여전히 모호하게 남아있다--뷰러위(M. Burawoy)의 작업은 이 공간을 채워주는 흔치 않은 시도였을 것이다. 세 번째 대안은 철학사, 또는 개별적 철학조류들에 천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는--캘리니코스의 {맑스의 혁명적 사상}과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대별되는--경향이었는데, 대체로 프랑스 철학이나 해체주의의 저변 확대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강한 의미의 당파성이나 진리관은 유보하더라도, 이러한 대안들이 서로 넘나들며 조망되지 못하는 한 이는 불만족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 러버링은 '실재론'(realism)의 범주를 활용하여, R.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이 사회이론의 대안적 철학적 지반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주장한다. 가치이론이나 시장 사회주의 논의가 인식론적으로 '근본주의'나 '신실재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분석과 조절이론이나 사회적 축적구조론이 방법론적 시사를 줄 수 있다는 주장은 구체적 동의 여부와는 별개로, 이론의 내적 지반과 구조를 밝힘으로써 각 이론의 성격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이해를 가능케하는 통찰이라고 생각된다.

바스카, A. 콜리어, D. 세이어 등의 논의는 아직 낯선 것인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실재론의 지반에서 사회주의 이론의 과학적 지반을 구축하고 이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특히 바스카는 자연과학에서 사회과학, 사회주의 정치 이론으로의 흥미있는 관심 변화를 보이고 있다. 러버링의 논의는 적어도, 맑스주의 철학에서 경험주의에 대한 찬양이나 이른바 '우발성의 유물론' 이외에도 가능한 대안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과학성이여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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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와 홉스봄의 파시즘

빈센트 나바로

 

얼마전 <한국논단>의 사상검증 토론회가 우리를 허탈하게 했지만, 가장 적극적인 대항담론은 우리가 그 후보들을 '민주주의 사상검증'을 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 후보들 중 혹 반민주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은 없는지, 민족적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특정 지역의 국민들을 배척하는 혹은 이용해 먹으려는 정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반노동자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민중과의 약속을 수시로 배신한 행적들은 없는지 검증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결국 서구의 '파시스트'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빈센트 나바로는 마침 올해 우리에게 소개된 켄 로치의 영화와 홉스봄의 저작을 매개로 파시즘의 성격과 반파시스트 투쟁을 의미를 진지하게 강의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당연한 것을 위해 더 면밀히 투쟁하는 법을 새삼스레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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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문제의 몇가지 측면

안토니오 그람시

 

흔히 [남부문제]로 알려진 이 문헌은 1926년 그람시가 체포될 당시 작업중이던 초고이며 따라서 미완으로 남아있다. 그는 이 글을 포함하는 일련의 시리즈를 출판할 예정이었다. 이 글은 흔히 그람시가 발전한 서구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혁명전략(진지전!)을 제공한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후진적 지역의 특수한 맥락에 기반한 사고를 하고 있었음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의 남부가 그러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글은 그가 이후 {옥중수고}에서 발전시키게 되는 여러 아이디어의 단초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옥중수고}가 이 '남부문제' 수고에 대한 방대한 후주로 읽혀져야 할지도 모른다. 역사적 블럭과 헤게모니의 문제, 지식인의 역할, 국민적-민중적(national-popular) 정치의 중요성 등에 대한 사고가 이전 평의회 운동과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경험을 기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최근 황태연 교수는 {지역패권의 나라}(개마고원) 등의 글에서 그람시의 이 문헌을 근거로 '호남당을 중심으로한 저항적 지역연합'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곡학아세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례들을 김대중 지지를 향해 끼워맞추고 있는 세세한 논거들의 결함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그람시의 맥락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몇가지는 지적되어야 겠다. 우선, 그가 '한국의 살베미니'라고 칭하고 있는 김대중은 살베미니라기 보다는 남부출신의 자유주의 수상 살란드라 혹은 니티와 흡사한 인물일 것이다. 살베미니가 추방당한 이후 미국에서 역사학자로서 토리노의 공장점거를 열렬히 변호하는 저작을 저술한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둘째, 그람시가 의도한 것은 남부의 대다수 '전통적 지식인'들과 고베티와 같은 새로운 민주적 지식인의 층위를 구분하고 이들을 노동자계급의 편으로 견인하는 것이었다. 황태연은 재야 노동운동의 독자후보파, 민중당, 이번 대선의 노동자후보를 이탈리아 북부의 꽉막힌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집단자살'과 똑같다며 질타하지만, 그는 호남 내부의 진보적이고 저항적인 세력의 형성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김대중이 호남 민중보다는 호남 자본가들과(그리고 앞으로는 영남 자본가들과 더욱) 결탁하든 말든, 결국 영남 노동자들이 김대중에게 표를 던지는 일만 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람시는 사사리여단과 참전용사 운동, 남부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동요(남부주의를 탈각하는 움직임)와 같은 것에 주목할 것을 끊임없이 촉구하고 있다. 셋째, 그람시적인 계급-지역 동맹전략은 여러 면에서 영호남 보다는 (황태연도 잠시 언급하고 있는) 통일을 전후로한 남한 노동자계급과 북한 인민 간의 동맹에 훨씬 적실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진지하게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수반동적 블럭을 파괴하도록 하는 것 이전에 그럴 수 있도록 PSI나 PCI와 같은 정치세력의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큰 왜곡들에 비하면 '대중성과 현대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며, 이탈리아 공산당을 '진보정당'으로, 민중권력을 '대권'으로, 그리고 '계급-지역 동맹'을 '지역-계급 동맹'으로 대체하는 것과 같은 의도적 오류는 차라리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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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에서 기어나오기 - 노동과정과 생산의 정치

폴 톰슨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가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내재적인 적대와 긴장을 만들어 낸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차원에서 {자본}을 재발견해낸 것이 브레이버만의 {노동과 독점자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과정론'을 브레이버만의 원론적인 테제 이상으로 이해하기 위한 문헌은 의외로 드문 편이다. 우리에게 The Nature of Work({노동사회학}, 경문사)로 알려져 있는 폴 톰슨의 이 논문은 80년대 이후 침체해 있던 노동과정론의 활로를 모색하는 중요한 논의를 담고 있다. 그는 노동과정 이론이 '구상과 실행의 분리'나 '통제의 강화'와 같은 몇가지 명제들의 단순한 확인을 넘어서 '생산의 정치'로 확장되어야함을 주장한다. '생산의 정치'는 뷰러위의 개념을 받아들인 것인데, 1983년에 씌여진 {노동사회학}에서는 뷰러위가 '동의'의 측면만들 협소하게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반해 이 글에서는 뷰러위의 1985년 저작 Politics of Production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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