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포스트모더니티, 그리고 또 한 번의 새 시대

좌파 지식인과 시대적 전환에 대한 현재의 과대망상

엘렌 메익신즈 우드



20세기 후반부에 좌파의 문화를 형성한 가장 결정적인 단 하나의 사건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붕괴'였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에 지배적인 지적 흐름들을 눈여겨 본다면, 우리는 좌파가 ― 비록 그 역사적인 신(神)들의 황혼을 환기시키고 있을 때조차도 ― 우리 시대의 크나큰 문화적·정치적 단절을 그 어떤 것보다 더 앞쪽에 위치시켜놓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토록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대략 25년 전, 즉 1970년 초반에 이미 우리가 하나의 시대적 전환, 새로운 시대의 탄생, 주요하게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연속적인 변화들과 질적으로 다른 도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이들 좌파 지식인들은 아마도 맑스주의 경제학자나 포스트모던 문화이론가들이었을지도 모르고, 제각기 그 새로운 시대를 다른 이름 ― 가장 일반적으로는 '세계화'의 시대 혹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시기, 아니면 때로는 둘다 ― 으로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시대적 전환'이라는 동일한 생각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중심 주제로서 흐르고 있다.

소위 새로운 시대의 일반적 개요는 모두에게 친숙한 것이다. '세계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시대의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특징은 확실히 국제적인 자본 ― 전 지구적 시장, 국제화된 생산, 민족국가로부터 자본의 국제적 대리인들로 향하는 주권 이동 ― 이다. 그리고 만약 이 모두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장기적인 역사과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기술 변화, 정보시대의 도래일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공산주의의 붕괴로 인해 강화 ― 공산주의의 붕괴가 원인은 아니었다 ― 되었는데, 이로써 자본이 전세계로 뻗어나아가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못하게 됐다.

'포스트모던'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똑같은 그림 조각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도 정보사회는 있고, 비록 구석에 있긴 하지만 전 지구적 경제도 그 그림 속에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심리학적 전환들이다 : 즉, 모든 낡은 확실성들의 붕괴, 모든 도덕적·정치적 기초의 해체, 유동하는 '정체성들,' 그리고 '탈중심화된 주체'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의 붕괴'가 모든 '거대 서사들'과 '계몽프로젝트'로부터의 후퇴를 가속화시켰을지도 모르지만, 그 역사적 균열이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우리 시대에 대한 이러한 스케치들이 충분히 그럴 듯해 보일지도 모른다. 전후(戰後)의 호황 이래로 자본주의 경제에는 주요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분명 정치적 변화들이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던 그 불황 ― 분명 일시적이었던 고전적인 자본주의 위기와는 다른 ― 이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설명하는 개념인 '지구화'나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우리의 유보조항을 제쳐둔다손 치더라도, 이 개념들이 어떤 식으로 단절의 순간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가?

현재의 '포스트모던'하고 '지구화된' 시대에 대한 이러한 스케치들을, 이번 회합에서 수없이 인용될 것이 분명한 {공산주의당 선언}(이하 {선언})의 유명한 몇몇 구절들을 배경삼아 잠시만 생각해 보자. 지금 막 열심히 찍어내고 있을 내일자 신문이라면, (다소간 문장을 수정하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땜질은 하겠지만) '세계화'에 대한 맑스의 설명을 적절히 이용할 것이다 : 즉, "지방적 및 민족적 자급 자족과 고립"은 "민족들 상호간의 전면적 교류와 전면적 의존"에 길을 내준다. 자본주의의 국제화는 "모든 만리 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한다" 등. 심지어 최근 아시아의 위기조차 이미 "주문을 외워 불러내었던 저승의 힘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그 주기적인 재발 속에서 점점 더 위협적으로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립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상업 공황을 드는 것으로 충분하다……공황시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 과잉생산이라는 전염병이"(405∼406)라는 구절에 예상되어 있다.

그 누가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해 맑스의 묘사를 능가한 적이 있는가?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항구적 불한과 격동……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모든 정체적(停滯的)인 것은 증발되어 버리고……(403).

물론, 초점은 이 구절들이 우리 시대의 구체적인 것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사실, 그 구절들은 자본주의의 어떤 구체적인 시대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자본주의 그 자체 그리고 자본주의 일반에 관한 것이다.

만약, 맑스가 그렇듯 초인적인 예지와 우리에게 친숙한 방법으로 우리 시대의 기본적인 특징들에 대해 묘사해 낼 수 있었다면, '시대적 전환'에 대해 무어라 말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 여기에서 쟁점은 자본주의의 이 단계 또는 저 단계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운동법칙,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변화과정을 처음부터 지배하는 체계적 논리이다. 21세기를 앞둔 자본주의가 19세기 중반의 자본주의와 같다라는 것은 분명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고, 하지만 그 끊임없는 변화가 애초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하나의 이해가능한 '과정의 논리 logic of process' ― 과정의 논리는 자본주의의 지구적 팽창과 사회적 조건에 대한 끊임없는 교란 모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 에 의해 이끌린다는 사실이 바로 핵심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도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단호하게 세계화를 하나의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시대'로서 이야기하려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화를 태초부터 자본주의의 체계적 논리 속에 뿌리박고 있는 변화의 한 과정으로서보다는 불연속적인 역사 속의 한 단계로서 다루자고 주장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복잡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답의 주요한 한 부분은 분명 정치적이다 ― 그리고 그 정치적 답변은 구체적인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다. 오늘날 강단 좌파(academic left)의 문화는 분명 현재의 조건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 문화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정치적으로나 지적으로 50∼60년대에 성장한 사람들에 의해 주로 형성된 학문 풍토(academic culture) 속에 살고 있다. 물론, 시대적 전환을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세대는 아니지만, 그러나 나는 그들이 가진 민감함이 좌파 내의 모든 학문 풍토 속에 널리 퍼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의 특징은 무엇이었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분명 60년대의 흥분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 세대의 좌파들이 처한 위치를 말해주는 한 가지 분명한 설명은 그들의 궁극적인 패배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어떤 패배를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60년대 대항문화의 주류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 분명 미국에서는 아니었다 ― 에 의해 추동되었다거나, 그들이 90년대의 학문 풍토를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사람들이었다고 거짓 주장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소련 식 공산주의의 운명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현재의 좌파 문화가 '몰락' 이전이든 이후였든 어쨌든 사회주의 실패에 의해 형성됐다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그것이 패배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한 마리 알바트로스의 죽음을 의미하는지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지도 모르는 60년대 세대에 대해 보다 일반적으로 뭐라 말할 수 있는가?

일단, 미국에 초점을 맞추겠다 ― 이것은 내가 68년 5월의 중요성이나 60년대 다른 나라들에서의 급진주의를 과소평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현재의 지적 유행이 프랑스의 철학적 권위에 깊이 의존하고 있을 때조차도, 미국에서 가장 뚜렷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나라들이 겪었던 경험을 다소간 감안하면서 내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필요한 조건에 변경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미국의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들의 상당 부분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다른 나라들에도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60년대 세대, 특히 미국의 60년대 세대는 소위 자본주의의 '황금 시대'에 자랐다. 그리고 20세기에 하나의 진정한 역사적 전환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그러한 맥락에서 자란 세대와 그 이전 세대 사이의 전환일 것이다. 그 이전 세대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판이하게 다른 성장기 경험을 갖고 있었다. 경제적 위기와 전쟁이 자본주의에 대해 그들이 가진 주된 경험이었고, 그들은 이를 자본주의의 정상상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후 세대는 어떠했는가? 그들의 기본적인 가정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나는 얼마 전, 60년대 영국의 급진주의자였고 여전히 좌파에 남아 있는 사람이 쓴 글 하나를 읽었다. 그는 많은 60년대 급진주의자들이 '내밀한 케인즈주의자 closet Keynesians'였다고 주장했다. 그 말의 뜻은 많은 사람들의 혁명적 수사가 실상은 혁명이나 사회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1945년의 약속을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복지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60년대 세대들은 거대한 개선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좌파들을 실질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의 종말이 아니라, 그러한 희망의 종말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좌파들이 자본주의와 화해하게 된 것은 (옳든 그르든) 그들이 사회주의를 실패한 공산주의의 실험과 연결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문제는 그들이 사회주의를 상대적으로 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케인즈주의]의 실패한 실험과 연결시켰다는 데에 있다.

물론, 현재 그는 1945년의 약속이 미국의 그것과는 달랐던 영국의 상황 속에서 글을 썼다. 결국, 영국의 60년대 세대는 전쟁에서 돌아와 노동당 정부에게 투표했던 자신들의 노동계급 병사들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노동자들 중 일부는 실제로 혁명적 기대들을 가졌다. 그러나 60년대 영국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나로 하여금, 미국에 대해서도 이에 상응하는 뭔가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끔 한다.

물론,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단지 두 세기에 걸친 노동운동에만 있는 건 아니다. 많은, 아니 아마도 미국의 대다수 급진 학생들과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불렀던 사람들조차도 케인즈주의적 용어로든 다른 용어로든 간에, 실제로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기업권력이나 국가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 확산되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흑인 민권투쟁이나 베트남전 반대투쟁을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투의 주된 지형은 실상 자본주의 경제가 아니었다. 물론, 거기엔 레닌주의나 마오주의의 입장을 취한 반제국주의자들과 흑인해방운동단체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분명 문제점들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물론, 이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래도 그들은 특별한 경우였다.

어쨌든, 일부의 매우 반(反)인종주의적이고 반(反)제국주의적 입장을 가졌던 사람들조차도 반드시 반(反)자본주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생각하는 한, 대다수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없애기보다는 배제된 집단들을 자본주의에 포함시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내밀한 케인즈주의자 혹은 무의식적인 사회민주주의자(미국이 결코 유럽적 의미에서의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대열의 출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 발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였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근거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내 세대의 많은 급진주의자들이 가졌던 가장 높은 수준의 열망은, 만약 그들이 이런 용어들로 생각했다면, 보다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자본주의 ― 인종주의나 제국주의가 없는, 하지만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인 ― 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황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많은 학생활동가들의 '혁명적인' 열망들이 자본주의의 범위 안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했던 것을 얻는 데에는 강력한 장애물들이 놓여 있었다. 반자본주의자였든 아니었든, 그들은 인종주의와 무엇보다도 냉전이라는 강력한 힘에 직면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국가의 전면적인 힘과 마주쳤고, 때로 이것은 무척이나 극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얻었던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해 해야만 했던 것 사이에는 불균형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몇몇 사람들에게는 혁명적인 순간으로 기억되는 60년대가, 사실은 그들이 가졌던 이행 목표의 범위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훨씬 제한된 목표를 가지고서도 직면해야 했던 반대와 더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들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세계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전후 호황이 끝나고 자본이 복수의 공격을 개시하자마자, 곧이어 상황은 많은 부분에서 더 악화되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좌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가 실패한데서 온 좌절이었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것이다 : 즉, 지금 우리는 그전의 어느 세대보다, 분명히 30년대에 성장한 세대들보다는 자본주의의 가능성들을 신뢰할만한 더 많은 이유를 가졌던 한 세대를 마주 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세대는 실망할만한 그들만의 매우 특별하고 역사적으로 특수한 이유를 갖고 있다. 어떤 면에서 사람들은, 그 세대가 이루지 못한 것들에 의해서만큼이나 그 세대가 이루었던 것들에 의해 좌절당했고 패배당했다.

거기엔 물론 다른 문제가 있다. 그 세대의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은 더 이상 노동자 계급이 변화의 행위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는 그밖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국은 심지어 사회주의 좌파조차도 소비주의가 노동자 계급을 매수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정도로 그러한 경향이 뚜렷했다. 아마도 그러한 경향이 남긴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지적 유산은, 자신들 스스로가 학생과 지식인으로서 노동자 계급을 대신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된 사람들의 저작들이다. 몇몇에게는 이것이 역사적 좌절이라는 감정을 악화시켰을지도 모른다. 결국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혁명의 주체로 간주되었다면, 혁명의 실패는 다른 어느 누구의 실패도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의 실패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몇몇은 그 실패로부터 다른 교훈을 내왔다. 그들은 단순히 자포자기하는 대신에, 일종의 오만, 극도의 지적 오만과 결합된 이상한 종류의 패배주의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어떤 형태의 사회적 이행도 포기한 채, '혁명'의 지형을 대학과 학술적인 텍스트의 정치학으로 옮겼고, 사회혁명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해체와 '파계 transgression'로 바꿔 버렸다.

어쨌든, 그 세대가 궁극적으로 '세계화'나 '대안은 없다 There Is No Alternative, TINA'라는 경로를 선택했든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티'와 대학으로의 파계를 선택했든지 혹은 몇몇 다른 선택을 했던지 간에, 그 세대는 아마도 자본주의의 진정한 한계에 대해 도전했던 최초의 세대였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자본주의를 경험한 동시에, 자본주의가 가장 성공적인 시점에서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에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맞섰던 최초의 세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미숙한 각성에 대한 반응으로는 크게 두 가지의 방식이 있었다 ― 혹은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다른 것들보다도 훨씬 더 미숙한 각성이었다. 우선,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가 60년대 세대가 원했던 더 나은 세상을 결코 가져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자본주의가 예전에는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을 지금은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시대적 전환, 대규모의 역사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고, 그 역사적 파괴는 자본주의의 기본 논리를 몇 가지 근본적인 방식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한 배경에서라면, 시대적 전환이라는 말이 왜 그토록 매력적인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인간적인 자본주의가 실제로 존재하며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가능성은 자본주의 발전과 진보의 불가피한 산물이고, 따라서 대중의 투쟁들로부터 약간의 도움만 받으면 획득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선 그러한 희망이 대단히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엔 주요한 역사적 전환이 있었고, 자본주의의 논리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으며, 따라서 예전에는 가능했던 것이 이제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따라서, 특히 세계화는 애초부터 자본주의의 근본 동학에 뿌리박힌 장기적인 역사적 과정이 아니라, 그 대신에 새롭게 달라진 자본주의 논리를 갖춘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되는 것이다.

사실 몇몇 사람들의 경우에는 최초로 자본주의 그 자체를 발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새로운 시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전후 호황기라는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시기 후에 다시금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자본주의의 기본 논리에 다름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세계화나 포스트모더니티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972년 혹은 그즈음에 태어나서 그들의 희망에 종지부를 찍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자본주의이다.

하지만 이 대신에, 비록 당신이 항상 복지국가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대중투쟁들을 통해 쟁취한 모든 주요한 승리들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언제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지속가능성에 대해 의심해 왔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능력이란 것을 진실로 항상 의심해 왔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스쳐가는 짧은 순간이었으며, 그것이 자본주의 진보의 종국적인 결과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유동적인 역사적 조건에 의존해 있음을 항상 생각해 왔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 축적과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적 명령이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 그리고 쾌적한 환경 등에 매우 엄격한 제한을 가하고 있음을 항상 생각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현재의 발전은 자본주의 논리상의 주요한 변화가 아니라, 언제나 그래왔던 자본주의 논리 바로 그 자체처럼 당신에게 보일 것이다. 물론, 당신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 속에서 많은 변화들이 있음을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현재의 발전을 거대한 역사적 단절이라고 여길 만한 근거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보편적이고, 보다 도전받지 않고, 뒤섞인 것이 없이 보다 순수해졌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보편화는 당신이 그것을 관찰하는 관점에 따라 매우 달라 보인다. 세계화를 시대적 전환으로 보는 모델은 오직 자본주의의 승리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세계화를 역사적 과정이라고 보는 모델은 맑스가 보았던 것을 본다 : 즉, 체제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들, 자본주의적 팽창의 모순적 논리들을 말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모든 시도들이 보다 파괴적인 위기들로 향해 난 길을 열고, 미래의 위기를 예방하는 데 필요한 선택의 여지를 좁힌다는 맑스의 예견을 입증해 준다.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낡은 방법들이 ― 맑스의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 점차 쓸모없어지기 때문에, 환언하면 바로 자본주의가 그렇게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새롭고 악화된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늘 밖으로 나아감으로써, 즉 제국주의적 팽창을 통해서 위기에서 벗어나왔다. 자본주의가 사실상 광범위해졌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낡은 형태, 즉 군사력에 의한 식민지 팽창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제국주의의 새로운 형태 ― 금융통제, 시장조작, 부채 등 ― 는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에 더욱 깊숙히 뿌리박혀 있고, 따라서 보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종속된다.

자본주의의 보편화는 보다 많은 자본주의 경제들이 전세계적인 경쟁의 장으로 들어온다는 것, 주요한 자본주의 경제들이 거의 자멸에 이를 정도로 수출에 의존한다는 것, 그리고 보다 많은 경쟁자들이 세계 시장이라는 동일한 시장을 목표로 생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스스로를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이 다가가려고 경쟁하는 바로 그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제약한다. 그리고 실질 사용가치가 창출되는 대신에, 거짓된 부(富)가 거의 빛의 속도로 실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주식시장의 호황 속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닌다. 오늘날 자본의 수익성 극대화는 점차로 절대적인 성장이나 외부로의 팽창에 의존하지 않는 대신, 재분배와 민족국가 내외에서 모두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증대시키는 것에 더욱 의존한다. 한편, 여러 지역에서 노동운동들이 다시금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신자유주의와 지구화에 맞선 저항들 ― 캐나다에서 멕시코, 프랑스, 남한에 이르는 ― 을 보았다.

오늘날의 발전은 역사적 단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과정, 즉 자본주의 발전과 팽창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늘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듯이 지극히 모순적이다. 자본주의의 강점은 또한 약점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과거 어느 때만큼이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옳다. 사실 사람들이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가진 점증하는 투명한 모순들 때문에, 과거 어느 시기보다 반자본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감소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대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팽창의 모순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다시금, 진실로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자본주의는 결코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정치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늘어난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라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