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는 글


확실하게 베껴먹기

 

 

요즘 가장 쉬운 일 중 하나는 지식인을 비난하는 것이다. 번영하는 한국 자본주의를 함께 찬양하다가, 이제 재벌과 정치인들 다음으로 욕을 먹게 된 그들은 억울하다는 소리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작년 11월의 신용공황을 선견지명으로 예측하지 못했다거나, IMF 체제 하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회생책을 내놓치 못하는 것이 그들 식자들이 가진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봐 이게 너희들이 찬양하던 시장경제 자본주의 아냐, 봐 이게 제국주의 아냐? 자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나가선 안돼"라는 이야기일 것이지만, 여전히 그런 담론은 드물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큰 일이 다 지나간 뒤에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자기 얘기인 척 뒷북치는 모습을 보기란 민망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이야기들은 토론되지도, 동원되지도, 검증되지도 않는다.

은밀한 직역(直譯), 은밀한 답습과 모방 보다는 확실하게 베껴먹는 편이 낫다. 우리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형태로 써먹는 것이 낫다. 문제는 그럴 수 있는 자신의 머리와 자신의 가슴이 없다는 것이다. 구제금융 결정과 함께 눈부신 속도로 '세계화'된 이 땅에서, 우물안 개구리 처지를 실감하는 우리는 그 베껴먹기에 일조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어 쓰려 한다. 외국의 유명한 학자들을 무슨 심오한 이야기인양 울궈먹기 보다는, 그것들을 제한없이 접근가능하도록 만듦으로써 그 모든 논의들이 절대적이지도 배타적이지도 않은 참고들(references)로 이용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카피레프트'라는 거창한 개념을 달고, 우리만이 저작권과 권위에 대한 투쟁의 첨병인양 행세할 생각은 없다. 이미 자생적이거나 의식적인 '해적'들은 도처에 숱하게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 모임 역시 아직 아주 소박하고 소극적인 작업을 할 뿐이니까. 그러나 우리의 방식이 하나의 실험이자 모험이듯, 여기 저기서 무엇이든 과감한 발상과 실천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카피레프트'라는 개념의 발전일 수도, 실천 방식이나 내용의 확충일 수도 있겠다. 아니, 그 모든 것이 필요할 것이다. 밑천의 바닥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한 집단(우리!)이 그것들을 다 채워가기란 요원한 일일 터이다.

요즘 부쩍 늘어난 '딱딱한' 껍데기를 가진 책들을 보며, 살 엄두도 못내면서(가벼운 주머니, 무거운 책!) 한편으로 영국 Bookmarks 출판사의 책들에 씌어있는 글귀를 떠올려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책은 Bookmarks 출판 협동조합의 도움으로 출간되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수입의 일부를, 대개 은행이나 신용기관에 저축해 두고 있다. 거기에 예치되어 있는 동안, 그 돈은 은행에 의해 이러저러한 사업에 대부되어 자본가들의 이윤추구를 돕게 된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사업에 대부되는 것이 더 좋다고 믿는다. 그것이 협동조합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한달 전에 고지를 통해 환불가능한 대부의 보답으로, 회원들은 Bookmarks에서 출판되는 책의 무료 복사본들을 받는다.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협동조합은 런던으로부터 말레이지아, 캐나다, 노르웨이까지 떨어져있는 250명 이상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

이는 하나의 구상일 수 있다. 적어도 지식은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례일 것이다.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어려운 사정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지금의 모습들은 올바른 자구책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디스커버리 총서> 만큼이나 <펭귄판 포켓북> 시리즈도 필요하지 않은가. 독립(인디!) 이론 저널들도 월간 <페이퍼>처럼 살아남을 수는 없을까. 통신공간의 가능성은 어디까지 활용될 수 있을 것인가. 소극장 콘서트나 거리공연과 같은 유통/소비 방식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언제나 그렇듯,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슨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얼마전 출간된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편의 {신자유주의와 세계민중운동}은 이러한 점들에서 오랜 만에 눈길을 끄는 책이다. 그 글들은 대개 전노운협 소식지 <주간정세동향>에 하나씩 실렸던 것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기획의 시의적절성뿐만 아니라 내용을 소화하고 소개하는 태도도 배울 점이 많은 것이었다. 예컨대 친절히 해설을 달고, 우리의 정세와 연관하여 역주를 붙이고 새롭게 해석을 해내는 것이다. 민노연은 지금 {경제대공황과 IMF 신탁통치}(한울)로 묶여나온 일련의 글들을, IMF사태가 시작된 11월부터 통신공간에 연재하고 공유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들 분석의 정합성이 어찌되었든 간에, 그 자세와 방식은 모두의 것이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올해 들어 3대 통신망과 참세상에 모두 '맑스동'이 생겨났다. {선언}의 출간 150년이 이래저래 환기되는 느낌이다. 카피레프트 모임도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참세상의 게시판(go copyle)에 한번쯤 들러 주시기를, 그래서 원고도 퍼가고 비판과 제안도 건네주기를. 홈 페이지도 조만간 마련될 것 같다.

1998년 3월
카피레프트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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