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의 탈수정


보리스 까갈리쯔끼



1989∼1991년의 사건들 이후, 15년이나 20년 전만 해도 현실적 세력으로 보였던 맑스적 사회주의는 다시 유령으로 돌아갔다. 그 이래로 전문 유령퇴치사들의 모든 시도들을 포함하여 맑스를 영원히 쉬게 하려는 끊임없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유령은 떠나지 않았다.

자크 데리다는 그의 논쟁적인 저서 {맑스의 유령들 Specters of Marx}에서 독자들에게 1848년에 씌여진 {공산주의당 선언}(이하 {선언})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오늘날 거의 한 세기 반이 지나서 수많은 이들이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의 유령으로 불안해하고 있는 듯하고, 또한 도처에서 유령이 육신 없이, 현전하는 실재(réalité) 없이, 사실성(effectivité) 없이, 현실성(actualité) 없이 존재할 뿐이라고 확신하는데, 이번에는 유령이 과거의 유령으로 여겨진다. 유령은 사람들이 오늘날 도처에서 듣고 있는 하나의 환각, 환상, 또는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Horatio saies, "tis but our Fantasie, And will not let beleefe take hold of him" : 호레이쇼가 말하길, 그것은 우리의 환각일 뿐이다. 그리고 그를 붙잡는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안도의 한숨은 여전히 불안하다. 즉 유령은 미래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신하자. 근본적으로 유령은 미래인데, 그것은 항상 올 것이고, [미래에] 올 수 있거나 다시-올 수 있는 것으로 현전(現前)할 뿐이다. 즉 지난 세기의 구유럽의 열강들이 말했듯이, 미래에 그것은 구현되지[ : 육신을 부여받지] 않아야만 한다.

공개적으로도 비밀스럽게도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도처에서 사람들이 수긍하듯이, 유령은 미래에 다시 구현되지 않아야 한다. 즉 그것이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다시-오도록 두어서는 안된다.

맑스의 시각이 더욱 더 생생할수록, 그를 매장하려는 욕망이 보다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아무도 '헤겔을 매장'하거나 볼테르를 반박하려 안간힘을 쓰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헤겔주의와 볼테르주의가 과거에 속한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철학자의 사상들은 현대의 이론들로 용해되었다. 맑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분석하고, 비판하고, 변화시키기를 꿈꾸었던 사회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주의의 종말은 오로지 자본주의의 종말과 함께 올 수 있는 것이다.

이 위대한 경제학자의 거칠고 단정적인 결론들은 불편함을 낳았다. 즉, 그 결론들은 자본주의 질서와 타협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온건하고 유연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어렵도록 만들고, 궁극적으로 그런 개인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구성하고 있다. 맑스주의를 수정하고자 하는 열망이 의회 노동자 정당들의 출현과 거의 동시에 일어났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보다 온건해지기 위해서, 사회주의는 수정주의(revisionism)를 거쳐야만 했다 : 만약 맑스주의가 과거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 거친 결론들은 현대 사회에서는 도덕적 중요성을 상실할 것이다.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남아 있는 것이라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일련의 일반적 '가치들'뿐이다. 자본주의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며, 따라서 지난 세기에 씌여진 책들에서 인용한 구절들에 기댄 채 자본주의와 싸움을 벌이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특정한 정치적 조건하에서 모든 신중한 정당은 타협을 추구해야만 한다. 정치에서는 세력들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실천을 자신만의 특수한 방식으로 이상화하고, 현재 행위들의 정당화를 미래의 이데올로기로 전환시킨다. 이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은 정치적 국면이 이상적 상태로, 무리한 편향이 현명한 전략으로, 약점이 용기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는 경우에, 패배는 불가역적인 것이 되고 전략적 약점은 전략적 무능이 되며, 운동의 목적은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정주의'라는 용어 자체에 관한 상업적 계산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맑스주의에 대한 재사고나 심지어 비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교의의 '자산'과 '부채'라는, 손에 쥔 이론적 현금의 기계적 계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계산에 따르면 몇몇 남아 있는 '가치들'은 사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적 생산물들은 폐물로 간주된다. 이러한 엄격함과 '정확성' 속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정통(orthodox) 중 가장 편협한 것에 상당히 근접해간다. 유일한 차이란 이러한 기계적 계산이 이데올로기의 모든 품목에 집착하면서, 흡사 나이든 가정주부처럼, 그 편협한 내용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집안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걸 증명하려 애쓴다는 점뿐이다. 수정주의 이데올로그들은 [맑스주의의] 약속들을 제거하고, '잉여적인'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신속히 내다 버리려고 노력한다.

수정주의의 분석적 방법은 아마도 묘사적이라고 지칭하는 게 가장 적절할 것이다. 고전적 맑스주의가 행했던 이러저러한 사회 현상의 묘사를 작금의 현실(reality)과 비교하면서, 수정주의자들은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아주 단호하게 주장한다. 이것으로 연구는 종결에 이르게 되는데, 왜냐하면 차이들 그 자체가 맑스의 결론들을 거부하는 이유들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논의할 필요는 없다. 이는 불필요한 일로 여겨질 뿐이다. 문제는 현실이 계속해서 변화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묘사된 사건들과 과정들 역시 과거 속으로 사라지며, 그들의 결론들은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역사적으로, 수정주의 담론은 사회주의 사상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에두와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레닌, 뜨로츠끼, 그람시 등의 출발점이었다. 맑스주의의 적실성에 관하여 주기적으로 재발하는 논쟁들과 가장 최근의 수정들은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의 역사에 전환점이 다가왔음을 나타내주었다. 이러한 논쟁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맑스주의, 또는 수정주의적 해석을 포함하여 지배적 해석들의 위기를 증언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공식 소비에트 학자들이 이전의 정통적 접근을 기각한 이래로, 많은 논자들이 수정주의의 일반적 결론들을 종합하고 거기에 이론적 뒷받침을 하려고 노력했다. 블라디슬라프 이노젬체프(Vladislav Inozemtsev)는 20세기 동안 서구에서는 "사회 체제의 내적 기반들이 근본적인 방식에서, 때로는 심지어 혁명과 내전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쳤던 것보다 더 큰 정도로 스스로를 재생산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노젬체프에 따르면,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는, 비록 피상적 관찰자들은 전부를 볼 수 없었겠지만, 1960년대 중반 경에 이러한 사회체(socium)를 자본주의 체제 경계의 바깥에 놓는 변화들을 경험했다". 서구 사회는 이행적 국면으로 들어섰고, 모든 후속 변화들이 "진화적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얘기되었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전 맑스주의적 사회주의의 모든 목적들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온건한 논자라도 부인하지 않을 사회적·정치적 투쟁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봉기도, 계급전쟁도, 몰수나 여타의 불유쾌함도 수반하지 않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1990년대에 나온 책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 저작은 신자유주의 또는 동구의 개혁에 관한 아무런 분석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에 살고 있는 저자가 이러한 현상들을 알 수 없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망각이 아니라 방법론에 있다. 그러한 주장은 다른 저자들에게도 역시 특징적인 것이다. 유명한 학술 저널 {폴리스 Polis}의 편집장인 I. K. 판틴(I. K. Pantin)은 사회주의 사상의 역사 속에서 맑스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지만 이후 역사의 경로는 맑스가 지적했던 부르주아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자본주의 생산이 발전하면서(임금의 증가, 대중 소비의 성장, 사회보장 입법, 일국적·국제적 수준에서의 자본과 정부의 권력 통합,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 등) 해결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의 경전들은 점점 더, 미래는 고사하고 현재보다는 과거에 보다 부합하는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한다."

수정주의 학파들은 1960년대에 서구 자본주의에서 일어났던 실제 변화들을 전통적 자본주의의 종말로 인식했다. 베른슈타인은 당대에 서구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보긴 했지만, 그는 이후 수정주의 학파들에 의해 수용된 단순한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것은 단연코 꺼렸다. 이와 같은 '새로운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그 어떤 수정주의자도 그것이 얼마나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복지국가는 도처에서 자신의 획득물을 내어주고 있었다. 시장 메커니즘이 일국적이든 국제적이든 점차로 모든 형태의 규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던 반면, 사적 소유는 신성하고 보편적인 원칙으로 보증되었다.

기술적 변화들은 '자유로운 창조성의 경제'를 낳은 것이 아니라 '값싼 노동력의 경제'를 낳았다. 착취의 강도는 강화되었다. 노동자들의 경영에 대한 의존성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임금은 개발도상국과 구(舊) 공산주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90년대 중반부터는 많은 서구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락했다.

수정주의 이론가들은 신자유주의를 무시하거나 그것을 단지 조화로운 사회 발전을 전체적으로 보다 복잡하게 만들 뿐인 일시적 현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지그재그 발전'이나 정치인들의 실수이기는커녕, 자본주의 전개의 대로(大路)이다. 그 핵심은 부르주아 사회가 더 이상 이전 수십 년 동안 이룬 사회적 성취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비록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회가 자신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할당하는 자원의 양이 1960년대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했음을 올바르게 지적하기는 했지만, 이는 중요한 지점을 놓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체제가 되면서, 불가피하게 잔혹하고 방탕한 체제가 된다는 점이다.

1989년 이후 취해진 반동(reaction)은 '진보'와 '현대화'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반동들과 다르다.

영국의 역사학자 윌리 톰슨(Willie Thompson)은 "사회주의자들의 용어에서 '좌익'과 '진보적'이라는 말은 실제로는 동의어였다"라고 이야기한다. 진보라는 사상이 현대의 의식을 지배했고, 좌파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은 이 사상의 가장 일관된 표현이라고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넓게 정의된 좌파는, 1933년부터 1942년까지 파시스트 치하의 몇 년간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문화적 물결들과 나란히 헤엄치며 정치적 도약을 해왔다. 반면에 우파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성공적인 행동들을 벌여내었든 간에 항상 방어적인 듯이 보였고, 1945년 이후에는 '만약 이길 수 없으면, 그들과 같이하라'는 입장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누구의 편에 있다는 믿음이 위안이 되는 신화일지는 몰라도, 이러한 형태의 위안은 좌파에게만 유용한 것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면, 우파는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살아야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모든 것이 급격히 바뀌었다. 19세기 이래 최초로 부르주아지가 공세적 이데올로기를 획득했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운동과 좌파 그리고 노동조합이 보수적이며 기술적 진보에 대해 적대적인 세력이고 당장의 번영과 '특권들'을 위해 미래를 희생하고자 욕망한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현대화와 활력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이라 주장했다. 이와 동시에, 진보 자체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환경주의와 페미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 이데올로기에 가했던 비판은, 보다 급진적인 진보 개념보다는 진보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의심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는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자연스럽고 이해할 수 있는 재고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좌파에게 이러한 사회 분위기의 변화는 파멸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시각상의 변화와 더불어 좌파의 문화적 중심 거점은 적들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결과적으로 좌파는 자신들이 정치적 영역에서 겪었던 그 어떤 패배에서보다도 더 무력해졌다."

독일민주사회당의 이론가들이 지적한대로, 1990년대 동안 신자유주의는 예전에 자본주의의 '문명화된' 성격의 증거로 인용되던 바로 그 구조들과 관계들을 현대화와 진보의 장애물로 선전하려 노력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반동의 기간이 기술적 갱신의 시기이기도 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이것이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유사한 일이 산업혁명의 첫 단계였던 19세기 전반부에 일어났었다. 한참 뒤에야, 새로운 기술들이 의기양양한 반동적 엘리트들의 지위를 강화한 것이 아니라 침식했다는 것이 분명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세기가 시작될 때 도입되었던 새로운 기계들은 곧바로 부르주아 공화주의의 패배, 고용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의 극적인 약화, 국제연합의 첫 선구자인 신성동맹 체계 내에서의 '신(新)세계질서' 확립 등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역설적으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산업혁명의 첫 사회적 현상은 노동자 계급 지위의 현격한 약화였다. 미국의 경제학자 프레드 블록(Fred Block)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리용의 비단이나 세필드의 칼제조업과 같은 장인 기반 산업들에서, 노동자들은 특히 작업장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보유한 장인적 지식 및 집합적 연대의 강한 결속력 덕분이었다. 더욱이, 그들이 장인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은 그들의 지위를 다른 노동자들과는 아주 다르게 만들었다. 비록 이들 장인노동자들이 때때로 사업의 순환주기로 인한 실업을 한바탕씩 감내해야 했지만, 그들은 노동이 겪어야 하는 모든 것들의 영향을 훨씬 덜 받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숙련은 시장과 사용자들의 강제에 대한 방어막을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근거에서, 블록은 근대 경제로의 이행이 대량생산과 19세기 후반부에 전형적인 비숙련(unqualified) 노동자에 기반해야 할 불가피한 이유는 없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전문화된 생산과 장인 숙련에 기반한 대안적 경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맑스 역시 산업혁명 전야에 영국 노동자들이 예외적으로 획득한 사회적 성취들을 지적했지만, 그러나 그가 보기에 산업혁명 기간 중에 새로운 기계들의 대량 도입을 자극했던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을 노동자들의 재량들(dictates)로부터 벗어나게 해줌과 동시에 노동자들을 자본에 더욱 이익이 되는 관계들에 속박시키려던 기업가들의 욕망이였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유럽 노동자 계급은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노동자 운동이 현대적 노동조합주의와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의 흥기 덕분에 힘을 키우게 된 이후에야, 반동은 새로운 혁명적 기운의 고조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뒤이은 한 세기의 경험은 노동운동의 특수한 일부로서 자리잡았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아주 위험스러운 오류를 떠올린다. 우선, 노동자들과 그들의 이데올로그들은 어떤 기술적·산업적 발전도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사회주의자이든 공산주의자이든, 개량주의자이든 혁명주의자이든 간에 이들은 모두 역사를 사회 조직의 보다 '전진된' 형식들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여 나아가는 직선적 과정으로 바라보았다. 반동 세력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과정을 지연시키거나 멈추게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가역적' 성취들은 잠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는 이들 두 가지 테제가 근거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기간 동안 좌파 세력이 겪었던 패배들은 20세기의 이전 타격들보다 훨씬 심각하고 그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역사는 직선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실제로 패배당한 것은 사회 진보에 대한 기계적 해석에 기반한 단선적 전략들일 뿐이었지만, 좌파와 노동운동의 역사적 환상들의 붕괴는 가치들의 전례없는 위기와 자기확신의 상실을 동반했다.

1960년대의 정통 맑스주의자들이 당시 일어나고 있던 변화들을 직시하지 않으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수정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적 반동의 중요성과 범위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1990년대의 사건들은 설령 자본주의의 내재적 본성이 어떻게든 바뀌었더라도, 그 변화들은 온건 좌파 이론가들이 희망했을 것보다 본질적으로 훨씬 작은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이들 이론가들이 언급했던 '새로운 현상들'은 상당 정도 계급 투쟁과 두 체제 사이의 투쟁의 결과였다 ― 즉, 외부로부터 자본주의에 강제된 것들이었다.

'역사의 종말' 이후, 후쿠야마의 사상에 완전히 부합되는 역사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불가피하게 질문이 제기된다. 이제 누가 낡은 쪽인가? 복지국가의 몰락 이래로 세계는 보다 안정적이거나 정의롭게 되지도, 심지어 더욱 자유로와지지도 않았다. 폭력이 사회생활의 규범으로 전화되면서 시민적 자유들을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 질서의 악덕들을 드러내보이면서도, 좌파들은 그것들에 자기 고유의 이데올로기로 맞서지 않는다. "좌파는 {선언}에 의해 착수된 혁명의 맑스주의적 기획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분명 혁명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제1차 인터내셔널로 시작된 맑스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명시적으로 사회주의적인 혁명이 아닐 것이다." 미국인 로저 버바흐(Roger Burbach)와 니카라과인 올란도 누네즈(Orlando Nunez)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을 기본적 요구들을 표현하는 자생적 운동들에서만 발견한다. 새로운, 보다 정의로운 사회는 "세계의 다양한 민족적, 종족적, 문화적 운동들의 융합으로부터 출현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대다수 운동들이 공공연히 반동적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좌파들은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있다. 좌파 자체가 자신의 심리적·도덕적 발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전통적 원칙이 없어지자, 좌파는 더 이상 무엇이 진보적이고 무엇이 반동적인지를 판단할 명확한 기준도, 또는 "민족적, 종족적, 문화적" 운동들이 세계 질서/무질서의 체제 내에서 행하는 역할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사고조차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동구에서 그러한 운동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경제 프로그램을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오늘날의 서구 좌파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이들의 눈에는, 새로운 야만주의의 표현들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구별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의 종족적, 민족적 정체성을 위해서 기꺼이 싸우고 죽으려 한다. 그러나, 20세기 초중반과는 달리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려는 이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정의를 위한 새로운 운동들과 포스트모던 사회주의들이 세계 도처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 및 이해들과 결부될 때에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극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개인들을 동원할 강력한 깃발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고들이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기까지 신자유주의의 폭정을 참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종족적 운동들 ― 이들의 지도자들이 최초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또는 사우디 아리비아의 왕과 접촉을 할 수 있게 된 운동을 포함하여 ― 의 일부 또는 전체를 지지할 것인가는 분명히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만들어낸 대중들 역시 맑스주의 사상에 고무된 이들이 아니었다. 인민들이 볼셰비키를 따른 것은 레닌과 뜨로츠끼가 보다 발전된 사회주의 이론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볼셰비키가 평화, 토지, 사회정의의 슬로건들을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작동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다. 만약 볼셰비키가 적절한 시기에 대중들의 이해를 표현하는 그들의 슬로건을 구성해내지 못했다면 ― 만약 그들이 맑스주의자들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혁명 과정과 계급 투쟁의 역동성을 비상하리마치 파악하지 못했더라면 ― 문제는 달랐을 것이다.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이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향한 투쟁이 아니라면, 그것은 패배하게 되어 있다. 사실 현실은 더욱 나쁘다. 대중의 의식 속에서 진보적 유토피아주의가 불신받게 될 때, 그것은 단지 하나의 불가피한 결과만을 낳을 수 있을 뿐이다. 즉, 반동적 유토피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목표에 대한 선명한 사상이 없을 경우, 전략이든 전술이든 수행될 수 없다. 레닌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사회민주당이 행한 주요한 기여는 맑스주의를 노동자 운동과 결합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폭발적인 혼합물이 실제로 세계를 뒤흔들었다. 참된 교육자로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이 충분히 인텔리겐차 대중들에 침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현실 속에서 그 과정은 상호적이었다. 대중들은 이론을 정교화하지 못하지만, 대중운동과의 연계가 없다면 이론은 굳어지게 된다. 맑스의 사상들이 노동자 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 그것들은 변형을 겪었고, 맑스주의가 되었다.

이론가들이 실천 활동가보다 더 급진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맑스 역시 정치에서의 타협과 사상에서의 타협을 구분했다. 만약 타협이 정치인들에게 허용될 수 있다면, 사상가는 '단순한 도덕적 빈틈없음'을 유지해야만 한다. 가능한 것이라고 항상 강제적일 수는 없다. 정치는 타협의 기술이며, 여기서 이론과 정치의 '분리' 가능성이 이미 존재한다. 레닌, 뜨로츠끼 또는 그람시의 구체적 행동들이 그들의 이론적 체계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었다(이는 그들의 '활동 시기'의 저작들과 그들이 투옥이나 망명의 시기에 작성했던 글 들을 대조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맑스주의의 대변자로서의 실제 활동은 그들의 이론적 질문들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남았다. 전후(戰後)의 시기에 이 연결은 끊어졌다.

맑스주의는 실제로 역사적 패배를 겪었다. 그러나 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0년대 말엽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 즉 이론이 운동으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되었을 때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스탈린주의적 '맑스-레닌주의'가 확립된 동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미 1930년대에 서구에서 강단 맑스주의는 대학 써클들의 영역이 되었으며, 또 한편 일반적으로 '고전적' 정식들이 사민당과 공산당들에게 죽은 의례 이상이 아니게 되었다.

1990년대에는 의례들조차 버려졌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벌써 오랫동안 아무도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론과 대중운동이 완전히 분리되었던 출발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양자는 오를 수 없는 벽 때문에 갈라진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중요한 층위가 사회주의 사상에 대하여 아주 흐릿한 관념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이들 사상들이 증식될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의 정치적 참조점을 상실한 지식인들은 자족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의 기본적 성격을 제한하고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어떤 정치이든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재분배가 항상 사회 정의의 목표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 사람들의 기본적 요구들도 구조적 개혁 없이는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간단한' 요구들 ― 학교, 병원, 도로 등 ― 이 가장 충족시키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는 사실 말이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그것들을 위한 충분한 돈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의 기획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서구 지식인들이 연마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급진주의와 다문화주의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고전적 맑스주의의 간단하고 소박한 언어이다.

맑스는 유토피아주의적 사회주의 기획을 일소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했다. 그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어떤 사회 사상이나 기획에도 유토피아적 차원이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치 이론에 대한 맑스의 결정적인 공헌은, 그가 실제적 변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유토피아적 백일몽을 폐기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맑스주의의 전통은 실용주의를 거부하면서, 이상주의(목표와 원칙에 대한 충실이라는 측면에서)를 구체적 행동들의 정치적 현실주의와 결합시킬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과학으로 전화시킨 것은 실제적 변화의 경험이었다. 따라서, 정치적 실천의 맥락에서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이론은 적실성을 갖지 못하고 만다.

서구 강단 맑스주의는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는 아니었지만, 종종 대중운동 및 정치적 행동으로부터 괴리되었고, 방대한 지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유토피아를 분별하는 능력을 점차 상실해 나아갔다.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반공세는 '반(反)유토피아주의'라는 깃발 아래 전개되어 나아갔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 좌파들 스스로가 '유토피아주의'라는 비난에 완전히 타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들'이라고 주창한 몇몇은 이러한 유토피아주의를(그리고 이에 동반하는 기본적인 진정성도 함께) 청산했다고 맹세했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이상에 충실하면서, 사회주의 내에서 유토피아적 전통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징후는 좌파 저널들의 이름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독일의 {창조적 유토피아 Utope-kreativ}, 스페인의 {유토피아 Utopias}, 프랑스의 {비판적 유토피아 Utopie-critique} 등이 그렇다. 반(反)자본주의적 좌파의 지지자들은 '구체적 유토피아'의 필요성을 입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좌파는 1백년 전에 맞닥뜨렸던 것과 동일한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유토피아에서 이론으로, 꿈에서 현실로 한 걸음을 내딛을 필요성 말이다. 이는 유토피아적 전통이 비난받거나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변증법적인 맑스주의의 의미에서 극복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유토피아들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경계 밖으로 단호하게 걸음을 내딛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맑스주의적 사회주의에 불가결한 반유토피아적 열망을 다시 한번 재활성화해야만 한다.

좌파의 취약성은 1990년대의 정치 생활에서 현실적인 사실이다. 따라서 반자본주의적 정치는 방어적 성격을 취해야만 한다. 자본의 공세에 대한 저항은 이러한 국면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은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좌파 자신의 능력과 반대자들의 목표에 대한 명확하고도 냉철한 이해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양보는 저항을 약화시킨다. 정치에서 대의(大義)에 대한 명확한 목표와 확신은 승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양보는 전진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는다. 20세기 후반의 역설은 좌파의 취약성 자체가 좌파에게 비타협성을 강제한다는 사실에 있다. 현재의 역관계에서는, '새로운 합의' 또는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사회적 타협을 위한 조건들'이 존재할 수 없다. 개혁을 꿈꾸는 모든 이들은 먼저 역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며, 이는 전통적 의미에서 혁명가나 급진주의자가 됨을 의미한다.

모든 의식은 제한적이다. 완전한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 포스트맑스주의 이론화의 잘못된 정의와 모호성으로부터 고전적 맑스주의의 거칠고 단순한 진리들로 복귀하는 것은 유효한 정치적 실천의 핵심적 조건이다. 지금 우리가 맑스의 처음 전제들 중 많은 것의 제한적 성격(그러나 허위는 아닌)에 대하여 엄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손치더라도 그렇다.

맑스주의의 탈수정(de-revising)이 교조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1917년 이후 처음 몇 년간 혁명적 사회주의는 혁신적이었지만 반(反)수정주의적이었다. 전통적 가치들을 포용하라는 요청은 대화의 거부나 밀폐된 존재를 유도하는 것과는 다르다. 전통에 대한 능동적 승인은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개혁의 시대 이래로, 신전통주의(neo-traditionalism)는 혁명가들의 이데올로기였다. 성경으로 복귀할 것을 요청했던 마틴 루터는 전형적인 신전통주의자였다. 전통적인 경건성을 회복하자는 슬로건 아래서 영국 청교도들은 커다란 사회적 전환을 성취했고, 자신들의 나라와 유럽의 역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 이러한 전통주의는 보수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전통적 가치들과 원칙들의 이름 속에서, 이들 원칙들을 왜곡하고 기각했던 세계가 거부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변화와 혁신이었다.

전통으로의 복귀는 가장 효과적인 동원 방법 중의 하나이다. 전통은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대중들에게 접근가능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엘리트들의 무정한 실용주의와 이기주의에 대립되는 것이다. 전통과의 관계를 배제한다면, 새로운 사상들은 대중적 의식과 동화되지 않는다. 불의에 대항하는 봉기들은 언제나 정의라는 전통적 사상에 의지한다. 투쟁의 과정 속에서 전통 자체가 급진적 변화들을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주 다른 문제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서구화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현대적 반응이다. 저항의 상당히 반동적인 형태로서의 근본주의는 전례없는 성공을 누려왔다. 그 이유는 근본주의가 20세기의 경험들을 통합하면서도, 대중들에게 자신만의 문화에 대한 확신을 되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근본주의를 새로운 현상으로 인정하는 서구 사회학자들(앤소니 기든스는 1950년대까지 이 말이 영어에서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지적한다)은 이에 직면하여 아주 불편함을 경험한다. 기든스는 근본주의가 "전 지구적 의사소통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면서도 사실상 전통적 방식으로 수호되는 전통과 '다르지 않음'"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 새로운 조건들하에서 전통은 전통적인 방법들로 방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호메트의 시대에는 플라스틱 폭탄도 자살 테러도 없었다. 인터넷의 이슬람 사이트도 없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대중운동들에 특징적인 동원 형태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근본주의는 서구와의 충돌 속에서 패배한 전통적 이슬람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이슬람은 근본주의와 계속해서 나란히 존재하고 있으며, 점차 근본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급격하게 근대화되지 않는 사회에는 근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이 침식당하거나 파괴된 곳에서만 근본주의는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현실과 기회들에 적합한 형태로, 말하자면 건설되고 갱신될 수 있었다.

기든스나 자유주의적 저널리스트들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근본주의는 모든 것을 '외계의 것alien'으로 거부하는 닫힌 체계와는 전혀 다르다. 반대로, 그것은 새로운 방법들과 새로운 경험을 끊임없이 동화시킨다. 그것은 세계에 열려져 있다. 다만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열려져 있을 뿐이다. 여기에 그것의 실제적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1930년대 이래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살아남은 민중주의와 파시즘의 전통을 단순하게 참조해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유럽 민족주의의 위험성과 같은 것이다. 공격적 행동은 전통의 의미를 급격하게 변화시킴으로써, 더 이상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확증된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으로 갱신되고, 풍부해진 전통인 것이다.

전통에 호소하는 사람들에는 반란을 일으키는 빈곤층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고자 분투하는 엘리트들도 포함된다. 신자유주의는 신전통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사례 중 하나이다. 자신만의 공격적 기획을 가지고 사회주의에 맞설 필요에 따르면서, 금융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그들은 새로운 사상을 발명하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고전적 프로그램으로 돌아가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황금 시대'에 살았던 이론가들의 저작 속에서 영감을 발견했다. 한편, 경제학에서 신자유주의 또는 신고전학파들은 낡은 자유주의를 기계적으로 반복한 것과는 달랐다. 끊임없이 인용되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조차도 결코 영국 경제학자들의 중심적 사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반동 세력들이 전통을 활발히 이용하는 것과 같은 시간에, 좌파는 그럴 능력이 없음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좌파는 그 주요한 전통, 즉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적극적 투쟁의 전통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사회주의자들이 다시 한번 현실적 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그들 역시 자신들의 기본 전제들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이론가들에게 점차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정치가들은 여전히 거부하지만 말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마도 최후의 이론가인 오스카 네크트(Oskar Negt)는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 좌파는 "전통으로 복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쓰고 있다. 이와 동일한 시각이 독일 민주사회당의 이데올로그 중 한 사람인 앙드레 브리에 의해서도 견지되고 있다. 좌파의 시각과 조망의 급진적 갱신을 호소하면서, 그는 다음을 강조한다. "나에게 있어 현대의 사회주의 사상은 또한 맑스로의 ― 비판적 ― 복귀(그리고 동시에 현존 자본주의 사회에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고 지구적 도전에 착수하는 전환)이기도 하다."

그것은 새로운 조직들의 창출을 허용하는 전통 바로 그것이다. 1996년 터키에서 사회주의 그룹들은 오랜 종파주의의 시대를 극복하고 단일 정당으로 단결할 수 있었다. 지도자로 선출된 36세의 우픽 우라스(Ufik Uras)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내 자신을, 그 최우선 원칙들로의 복귀에 기반하는 맑스주의라는 개념으로, 맑스주의자로 정의한다."

여기서 논의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몇몇 '황금 시대'에 대한 세련된 노스탤지어는 아니다. 물론 정치적 선전에 노스탤지어를 활용하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고, 아주 효과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좌파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결의하는 곳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재획득할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사회는 새로운 사상들과 꼭같은 정도로 강력한 전통들의 필요성을 경험한다.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전자도 후자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좌파는 그것들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결여하고 있다.

맑스주의로의 복귀는 무엇보다도 좌파의 정치적 사고에서 계급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적 맑스주의는 결코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 사회에 존재하는 유일한 모순이라거나 필연적으로 가장 첨예한 모순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사회가 완전히 그리고 예외없이 계급들로 분할되어 있다고 단언하지도 않았다(19세기 초 독일에는 계급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그들의 주장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맑스와 엥겔스는 단지 노동과 자본간의 모순이 관건이며, 그것 없이는 다른 문제들과 모순들도 해결될 수 없다고 (또한 아주 적절하게) 주장했을 따름이다. 계급 환원주의는 사실상 맑스주의 전통의 실제적 특징이었다. 많은 맑스주의자들은 그 시대의 '중심적' 모순을 이해함으로써, 말하자면 '부차적'인 것들에 대한 사고의 필요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면제해 왔다. 그러나, '부차적' 모순이 '주요한' 그것보다 덜 현실적이지 않으며, 후자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전자의 이해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맑스주의적 분석이 점점 더 빈곤함, 무미건조함, 도식성, 원시성으로 둘러싸여 왔던 이유였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맑스주의 전통 전체에 대한 불신에 기여했던 것이다.

사회생활의 풍부성과 다양성을 의식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서구의 많은 사회학자들은 계급이 사회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특히 사람들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생산보다는 소비를 통해 규정하게 된 이래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커다란 역할을 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동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의 광범한 탈계급화와 대중들의 원자화를 목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는 생산 없이는 불가능하고, 탈계급화는 계급구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노동과 자본간의 모순은 새로운 다양한 문제들의 등장과 오래된 문제들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노동과 자본간의 대립은 이해의 충돌일 뿐만 아니라, 가치들, 원칙들 및 도덕들의 대립 역시 포함한다. 굳건한 지반에 의지하는 윤리적 사회주의만이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굳건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1996년 경 러시아 음악계의 시즌 히트 음반은 '가장 중요한 것에 관한 옛 노래들 Old Songs about the Most Important Thing'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것은 소비에트 몰락 이후의 스타들이 옛 소비에트 시대의 노래들을 리메이크한 것이었다. 이 레코드의 구매자들은 스탈린 시대를 꿈에 그리워하는 퇴역 군인들이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원래 판본을 더 좋아한다. 이 음반은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생활을 거의 회상할 수 없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크게 성공했다. 이 새로운 연주는 그들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것, 그들이 포스트모더니스트 노래들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것들에 관한 노래들을 경험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것들에 관한.

역사적 맑스주의에 대한 일종의 '리메이크' 요청이 도처에서 느껴지고 있다. 그것은 현재 인류의 주요한 기본적 요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현대 좌파 운동의 주요한 그리고 본질적으로 독점적인 과업이다. 우리가 이러한 과업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의미도 정당성도 갖지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