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온 유령을 환영하며

{공산주의당 선언}의 현재적 유의미성

다니엘 벤사이드



자본의 악무한적 순환운동

1. {공산주의당 선언}(이하 {선언})은 비인격적인 '사회적 잠재력'으로서 자본이 갖는 엄청난 생명력을 간파하고 있다. 역사적 가속화의 비밀은 바로 전세계를 뒤흔드는 자본의 이러한 역동성에 있다 : "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온 관념들 및 견해들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모든 신분적인 것, 모든 정체적인 것은 증발되어 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은 모독당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생활상의 지위와 상호 연관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 {선언}은 자본의 이러한 확장과 가속화 운동의 본질적인 논리를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부르주아 계급은 이 운동을 이용하여 세계 시장을 착취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산업으로부터 그의 국민적 바탕을 거세하고, 새로운 필요 들을 창출하며, 정보의 생산뿐만 아니라 물질 생산에 있어 세계적 상호의존성을 더욱 심화시켜 마침내는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문학으로부터 '세계 문학'을 생성하기에 이른다.

3.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교묘하게도 중립적인 의미로 쓰이는 '세계화'라는 단어는 사실상 상업적 관계의 전 지구적 보편화 과정의 종착역일 따름이다. 상인들이 모든 것을 독점하며, 인간의 육체도, 조직도, 예술 작품도, 인류 공동의 자산도 모두 상업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왜곡된 상업의 보편화는, 가장 뒤쳐진 후발국가가 선진국을 따라잡는 식의 '균등화'와는 거리가 멀며 새로운 분열과 불평등, 억압과 분파주의를 양산한다.

제국주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변화시켰을 뿐이지 사라지지 않았다. 상업은 서로 다른 풍속을 조화시키는 대신 모두가 모두에게 적대적이 되는 전쟁상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과학과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여태껏 알려진 적이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 현재의 상태를 볼 때, 과학기술에 의한 이 해방의 가능성이란 새로운 노예화와 소외, 육체적·도덕적 비참함으로 변화할 소지가 다분하다.

4. {선언}은 '근대적인 생산 관계와 부르주아 계급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소유체계에 대한 투쟁을 선언'한다. 150년 전 이래 과도적인 투쟁의 부산물들과 더불어 이러한 투쟁은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이 싸움은 飁로는 혼란으로, 때로는 전쟁으로, 또 때로는 혁명의 형태로 나타났다.

5. 이 혼란의 근원은 상품의 두 가지 존재 형태로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구분, 구매와 판매의 분리,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의 분리, 재생산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자율성 등이며, 이러한 분리로 인해 오직 '폭력'만이 간헐적이나마 통합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전 지구적 상업관계의 보편화는 '사회적 위기'와 '생태적 위기'가 중첩된 형태로 미증유의 '문명의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위기는 사회적 생태적 불평등이 교차하는 장소인 지구의 제국주의적 분할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6. 인간학적 의미의 '노동의 종말'이 문제가 아니라, 비인격적 자원 재분배라는 가치법칙하에서의 임노동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노동이 문제시되는 것이다. 교환과정은 구체노동을 추상노동으로, 복잡한 노동을 단순한 노동으로 나날이 격하시키고, 노동으로부터 그 모든 질적 특성을 배제하여 사회적 추상의 수준으로 통합하며, 노동자 계급을 시간에 의해 지배되고 마모되는 단순한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맑스는 노동과정의 복잡화, 사회화, 집단적 지적 노동의 생산과정에로의 편입이라는 역사적 경향성이 점점 더 비참하고 비이성적인 상태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예견한 바 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상태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생산력의 발전수준은, 그것의 사용을 임의적으로 제한할 수만 있다면, 노동의 생산물이 효과적으로 사회적, 집단적이 되고 노동이 그것의 직접적 형태하에서 부의 원천이기를 멈추며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자유로운 시간을 위해, 혹은 새로운 필요의 만족을 위해 전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원 배분과 고용의 창출 및 배치를 맹목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가치법칙이다.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이 가치법칙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 아주 짧은 시간에, 거의 동시적으로, 자본의 빠른 이동과 이를 가능케하는 금융시장을 통해 관철되고 있다.

'축적된 방대한 사회적 힘'인 노동시간을 측정하는 것, 즉 노동시간을 가치법칙이라는 족쇄에 얽어매는 것은 상술한 바와 같은 불평등과 위기, 보편화된 탈규제를 낳는다. 노동력의 상업적 착취와 사회적 노동시간의 측정이라는 공통기준으로 사회적 관계가 전락해버린 사실은 광범위한 실업과 대중적 소외 및 재생산의 순환적 위기를 통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점점 증대되는 사회적 활동의 광대무변함은 추상노동이라는 유일한 요소로 환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7. 마찬가지로 상업의 논리는 미래라는 시간을 평가절하하고 생태계에 고유한 한계, [종(鍾)의 확대] 및 비가역성의 효과를 무시한다. 자연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라는 두 가지 대립적 논리가 여기서 맞선다. 전자는 태양광선의 흐름을 원천으로 종을 극대화하는 것이며, 후자는 비상업적이고 재생불가능한 종을 혹사해가면서 자본 흐름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대차대조표로도 표기가 불가능하다. 자연의 리듬은 장기지속을 기반으로 조화를 이루지만, 경제적 합리성은 눈 앞의 이익을 성급히 추구한다. 자본주의는 내일에 대한 걱정없이 눈 앞의 쾌락만을 좇으며 하루하루 불안하게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관료주의만이 자본주의의 근시안적인 이기주의에 필적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주의적 비판은 '자본 물신주의'이라고 받아들여진 사상에 대해 가차없는 판결을 내린다. 시장은 필요보다는 욕구를 충족시키며, 화폐는 현실적이지 않고 환상적으로나 존재하며, 화폐의 집합적 사용은 개인적 사용의 산술적 합 이상의 것이다. 또한 그날의 이윤이 반드시 다음날의 고용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상업적 경제는 생태계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작은 목표를 위해 생태계 전체를 희생시키고 있다. 경제학적 계산에 대한 생태주의의 비판은 '보존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상업적 합리성'과 '세대 계승을 통한 종간 연대성' 사이에 팽배한 모순을 폭로한다. 생태주의의 비판은 필요와 부에 대하여, 경쟁법칙에 의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장기적인 관점의 새로운 가치평가를 추구한다.

결국 그것은 다른 경제,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새로운 경제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는 정치가 자주관리적 계획을 통해 경제 논리를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8. 그렇다면 맑스는 생산력 제일주의를 신봉하는 악한 천재인가, 아니면 생태주의의 수호천사인가?

그가 살았던 시대의 프로메테우스적 환상을 맑스로부터 제거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고유한 의미로서의 진보와 과도한 산업화에 대해 무관심한 칭송을 읊어대었다고 간주하는 것 역시 불합리한 것으로 보인다. 부분적이나마, 합리성의 영역에 존재하는 상업 경제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그로 하여금 다음의 것들을 주장하게 한다. 자본과 소비에 의해 끊임없이 확장된 재생산은 총자연에 대한 착취이며 전 지구에 대한 착취를 내포한다는 것, 그리하여 자연은 이윤법칙의 명령하에 인간만을 위한 대상물 혹은 효용과 관계해서만 이해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맑스가 진보에 관한 맹목적인 옹호를 버리지 않은 이유이다. 생산력의 발전과 필요의 증가는 분명히 개인과 종의 잠재력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본의 제약을 받는 결정은, 노동과 상업적 이익에 연계된 그 특성으로 인해, 필요를 왜곡시킨다. 즉, 생산력이 적대적인 물신이 된다는 말이다. 생산과 자본순환으로 끊임없이 확장된 원환운동에 의해 생겨난 이 보편화(l'universalisation)는 불구적이고 불평등하며 형식적인 보편화이다.

비난의 대상은 진보 그 자체가 아니라 추상적이고도 일면적인 진보의 한 성격이다. 기술 진보는 "자본이 갖는 지배력만을 키울 따름"이며, 자연을 "무상으로 주어진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그 가치를 폄하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의해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이 진보는 "노예화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이지 그것을 폐지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게다가 종적 재생산의 '자연적 조건'을 고갈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발명품과 진보는 지적인 삶에 물질적 능력을 더해 주는 듯 보이나 실은 인간적 삶을 야만적인 물질적 힘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 모든 결함과 환상의 탈각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필요에 적합하고 자연과의 공존을 존중하는 기준에 따라 진보가 재고될 여지는 남아 있다. 노동시간의 과감한 단축은 오늘날 이윤법칙에 의해서만 지배받고 있는 육체적 쾌락과 유희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할 것이며, 남성과 여성간의 관계의 질적 변화는 종적 보편성 및 바꿔치기할 수 없는 두 성간의 차이, 이 양자를 최초로 동시에 경험케 할 것이다. 그리하여 효율적이고 연대에 기반한 이러한 인간성의 세계화는 혁명적인 국제주의(l'internationalisme revolutionnaire)를 예시할 것이다.

9. 시장법칙과 착취관계는 사적 소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질문은 {선언}과, 다음과 같이 말하는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사적 소유의 철폐'라는 단 하나의 표현으로 집약할 수 있다"(413). : "이 모든 운동들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은……소유 문제를 운동의 기본 문제로 내세운다"(433).

여기서 분명하게 문제되는 것은, 모든 형태의 소유를 폐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오늘날의 사적 소유, 즉 부르주아적 소유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에 기반한 전유의 형태를 폐절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적 소유의 전례없는 집중을 수반하는 소유의 상대적인 또는 가시적인 확산이 진행되고 있으며, 공적 공간과 공적 권력은 침해되고 있다. 즉 생산의 사유화 혹은 재사유화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보와 서비스, 물, 공기, 화폐, 법, 그리고 폭력의 문제인 것이다.

다자간 투자협정(MAI)이나 새로운 대륙간 시장협정의 경우, 국가적 장애물을 쓸어내면서 인민에게 자기의 법칙을 강요할 것을 꿈꾸는, 만족을 모르는 탐욕을 드러내는 예라 할 수 있다.

10. {선언}은 언급된 사안의 임박성을 나타낸다.

1848년 이래 미래의 혁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급 투쟁이 세계 역사를 둘로 갈라놓은 것이다. {선언}은 이러한 균열을 명료하고도 조리있게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단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직접적 서곡이 될 수 있을 뿐"(433)이며, 그로부터 민주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런 논의가 2년 후 공산주의자동맹의 연설문에서 '영구혁명 la révolution en permanence'의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영구혁명의 사상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 정치적 혁명에서 경제적·문화적 혁명으로의 이행, 그리하여 마침내 일국 차원의 혁명에서 세계혁명으로의 이행을 하나의 대수 공식 속에 담고 있다.

11. 인민의 봄 시절 권력관계를 서로 연결짓는 정치적 전략의 국면은 국민국가와 관련된 것이었다. {선언}의 저자들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트는 우선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해야만 하며, 스스로를 국민으로 정립해야만 하기 때문에, 비록 부르주아지가 생각하는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아직 그 자체 국민적이다"(418).

왜냐하면, "민족들의 국민적 분리와 대립들은……점점 사라져 가고"(418)있기 飁문이다. 이는 1848년에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세계화(mondialisation)는 정치적 리듬과 공간의 변용을 가져오며, 국가 전체에 걸친 일괄적인 규제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국가 차원의 조절의 위기를 초래한다. 어떠한 조직적 시대도 우리 시대만큼 임계선을 넘은, 즉 국가와 민족과 영토의 안보질서가 해체되고 있는 시대는 없었다. 현 시대는 재구성없는 해체의 시기이고, 종합없는 모순의 시대이며, 지양없는 투쟁이라는 불확실성의 시대인 것이다.

12. 정치에 의해 종종 일깨워진 대의제 국가에 대한 위기와 불신은 근대적 기반이 쇠약해지는 경향의 가시적 결과일 뿐이다.

이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 의해 언급된 위기를 예시한다. "정치가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경제적 공포와 인류애적 도덕심의 환상적인 위로 사이에서 시민성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그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에 걸쳐 실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시민성의 실현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투쟁은 계속되고

13.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400). {선언}은 유령의 비밀을 밝혀내며 역사 운동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면서 유령을 실체화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구(舊)체제의 정치질서를 근대적 계급 사회로 변모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근대적 계급 질서는 시민사회로부터 정치 생활을 격리시키고 직업을 사회적 지위와 분리시킨다. 당분간은 오래된 조합적(corporatif) 정신이 국가 관료제를 통하여 근대 사회에 잔존하지만, 그 억압은 보편 이해를 유의미한 것으로, 그리고 특수 이해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14. {선언}은 자본의 지배에 고유한 지배적 계급관계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점점 양극화되어가는 대결관계의 단순화를 알려주고 있다. 이 예측은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며, 동시에 {선언} 자체 내에 존재하는 모순의 원천이 되고 있다. 산업의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힘, 집중, 의식을 확대할수록, 경쟁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산'시킨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무(無)로부터 뭔가가 탄생할 수 있을까?

자기 노동의 최종 생산물을 빼앗기고 공장노동에 시달려 불구가 되고, 상품물신주의의 지배를 받는 가련한 존재들이 억압과 착취의 강철같은 족쇄를 깨부술 수 있을 것인가? 어떠한 무기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의 마법에 걸린 이 세계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을까?

{선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적 계급으로 구성한다는 사회학적 내기로 대답하고 있다. 1890년의 엥겔스의 서문은 이를 확신한다. {선언}에서 제안된 것들의 확실한 승리를 위해 맑스는 공동의 행동과 토론을 통한 노동자 계급의 지적 발전을 제시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발전이 곧 그들의 정치적 해방을 결정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암울한 역사는 진보의 환상과 지난 시대의 과학에 경도된 이러한 낙관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15. {선언}은 계급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계급 관계의 개념적 구성은 {자본}의 미완성된 마지막 장까지 이어진다. {자본}의 경우는 이 질문(계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비사회학적 보고서가 될 것이다. 즉 맑스의 이론은 경제학적 분석도 아니며 계급에 대한 경험적 사회학도 아니다. 대상을 정렬하고 분류하고 색인을 만들고 갈등의 국면을 달래고 어르기 좋아하는 도구적 합리성에 대항하여, 맑스는 상업적 환상의 비밀을 통찰하게 하는 사회갈등의 내적 논리에 천착한다. 이는 사회의 다양한 적대가 계급 관계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계급이라는 전선의 대각선이 이들을 빈틈없이 연결하고 작동시키고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실증주의 사회학이 사회를 마치 사물을 관찰하듯 객관적으로 다루는듯이 보이지만, 맑스는 그것들을 '관계'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맑스는 하나의 계급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는 상호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계급들을 통해 투쟁과 적대의 관계를 이해한다.

16. 따라서 계급이 자본 그 자체의 운동을 통해 자신의 결정양태가 전개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자본}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계급은 생산의 단계도, 순환의 단계도 아닌 총체적 재생산의 단계에서 마침내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초의 계급 관계는, 생산단계에서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 사이의 노동시간 배분에 관한 투쟁과 착취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그러나 일상적 상황하에서 노동은 자기의 법칙을 강요하는 자본에 종속된 채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순환과정에서 결정되는 계급 관계는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사이의 적대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임노동자와 화폐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자본가 사이의 투쟁이다. 여기서의 투쟁의 단계는 아직 잉여가치의 착취는 아니며, 상업적 관계에 있어서 노동력을 매개로 한 밀고 당기는 싸움이다.

마침내 총체적 재생산의 과정에서 계급은, 잉여가치의 강탈과 소득분배,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의 노동력의 재생산, 노동의 조직 및 분업과의 구체적인 결합 속에서 결정된다.

계급은 사회 내에서 그 계급에 속한 개인들의 산술적 합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평균이윤율이 총자본의 총노동에 대한 착취의 정도에 의존하는 한, 계급투쟁은 이익의 배분을 둘러싼 이해 관계에 얽힌 문제로 축소될 수 없으며, 전체 자본에 의한 노동자 계급 전체에 대한 착취, 즉 총자본의 총노동 착취를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계급 관계는 한 작업장 내에서의 임노동자-사용자 사이의 일 대 일의 대립 관계로 환원 불가능하다. 계급 관계는, 노동력의 일반적 재생산에 필요한 필요노동시간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것과, 경쟁의 대사작용을 전제한다. 결국 이러한 재생산의 조건을 결정짓는 것은 투쟁 그 자체인 것이다.

17. 비록 {자본}이 계급을 다룬 단락을 미완인 채 남겨둔다 하더라도 계급 투쟁에 대한 명료화가 가능하다.

맑스는 가장 발전된 국가라 하더라도 매개적이고 이행적인 단계들이 구체적 경계선을 흐리게하므로 계급의 분화는 명확한 형태로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사회구성체의 실질적 형태가 생산 관계 구조의 현시로 온전히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것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기억, 투쟁의 경험 등과 같은 정치적, 문화적 차원을 포괄한다.

얼핏 보기에, 자본, 임금, 노동력을 가능하게 하는 소유는 '거대 계급'을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더 살펴보면 이러한 굵직한 분리는 정치적 투쟁의 장에서 서로 얽힌다. 그것이 바로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계급결정의 복잡한 모든 측면을 고려하여 현실에서의 계급 투쟁을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 있다.

18. 맑스의 이론에서 계급 투쟁은 사회적 적대의 현상적 서술에서 유래하지는 않는다. 계급 투쟁은 자본주의적 교환과 축적, 공황, 생산관계의 핵심에 있다.

계급 투쟁은, 생산관계에 의한 것이든, 가족, 성, 세대, 인종 혹은 민족에 의한 것이든, 역사적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의 시대에 있어 계급 관계는 역사 동력의 이해에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지역과 동아리를 넘어서 사회체를 작동하게 하는 다양한 모순의 실타래 중에서, 계급 전선은 보편성의 담지자로서 미궁을 빠져나갈 수 있는 한가닥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벽이나 전선 혹은 신념의 또다른 이면이 항상 존재해 왔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 시기에 관한 문제는 계급의 소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누가 부르주아지의 존재와 사적 소유의 집중, 강화 및 착취의 일상적 존재를 진지하게 의심하겠는가?) 임노동자 자신과 노동의 변화에 있어 구성 및 해체의 과정과 연관된 불확실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어떠한 조건하에서 노동의 새로운 조직형태와, 소비의 개인화 및 사유화, 정보와 부의 유입에 의한 사회의 분해 등이 실질적으로 집합적 의식의 재구축을 가능하게 할 것이가? 어떠한 조건하에서 사회운동과 정치현실의 괴리가, 사유화 대신 공유화가 진행되고 공동의 자산이 정치적 지배로부터 자유로와지는 세계로 극복될 것인가?

대답은 그간의 경험으로부터 도출된다. 계급들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계급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이다. 실업계의 거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부르주아가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이다.

20. 투쟁은 게임이 아니다.

끝없는 게임처럼 계급 투쟁은 잠정적 결과(승리, 패배, 혹은 타협)만을 낳는다. '잠시 멈춤'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의 규칙은 참여하도록 강요받는다면 아무도 끼여들지 않는다는 것과 참가해야만 하는 자는 게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이동하면서, 카드의 패를 바꾸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 사회적 이동성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 계급이동과 지위 상승을 허용한다. 그리하여 개인들은 넓은 초원에서 그들의 계급과 지위를 맘껏 골라잡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래도 역시 전체적으로 볼 때, 역할 분배는 사회적 재생산 체계에 의해 영속적으로 큰 변동 없이 이루어진다. 피억압자는 고통스럽더라도 여전히 억압과 짓눌림에 저항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에의 필연성은 계급 투쟁과 게임 이론 사이의 그 모든 혼동들을 단호히 부정한다.

21. 계급이 생산, 순환, 재생산 관계, 국가의 층위에서 다중적으로 결정된다고 할 때, 구체적 계급 투쟁은 한 기업 내에서의 착취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한 사회구성체는 정치적 갈등과 대표체에 의해 기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매개물(민족, 국가, 당, 지배-종속의 국제적 관계)을 거치며 그것들이 계급 투쟁을 정치적 투쟁이게 만든다.

22. 성적 억압관계는 일정한 생산양식하의, 한 시대에 특수한 계급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즉 이들은 계급 관계에 있어 중첩되고 결절된 마디들을 갖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하의 가정경제는 상업경제에 종속된다. 가사노동은 임노동과는 다른 노동시간과 판단과 계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교환경제는 이행중에 있는 가정경제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국가간의 부등가교환과 마찬가지로, 국내 시장의 차원에서 이를 기본적 축적의 도구로 사용하며, 여기서 착취받는 가정경제의 은폐된 역할이 드러난다.

이로부터 여성해방 운동의 전략적 자율성이 요구되게 된다.

23.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갈등을 정의할 수 없을만큼 다양하게 만들고 전지구적 차원의 모든 규제와 사회 관계의 일치성을 부정하는 데 사용된다.

이기적이고 분파적인 이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들은 창문없는 고립된 원자들로서 독방형을 선고받을 것이며, 보편화된 개인들의 세분화는 상품 물신주의 최고의 형태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이렇게 하여 자본 그 자체를 제도와 관계들의 무차별화된 망 속에 용해시킨다.

그러므로, 만약 자본의 축적이 다양한 억압들을 촉진하고, 그 지팡이 아래에서 이들을 고양하고 지속시키고, 또한 결합시키고 통일시킨다면, 계급 투쟁은 다른 것들 가운데의 한 가지 투쟁[일 뿐]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 속에 사회화를 구조화하며 투쟁의 여타의 양식들을 결정한다.

현존 질서를 소멸시키고자 하는 현실의 운동

24. {선언}은 미래 사회의 계획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선언}은 완벽한 사회의 모델을 제안하지 않는다. {선언}은 현실의 사회적 활동을 천재적인 사회체계의 설계로 대체하지 않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해방의 역사적 조건을 환상 속의 조건으로, 프티 부르주아지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로 인내심있게 조직하는 과정을, 실패할 것이 뻔한 보기 좋은 예로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현존 사회를 근본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현존 질서를 폐절하는 실제적 운동을 명료하게 할 방법을 {선언}은 찾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적이지도 않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 주장하지도 않는, 현실의 갈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실현가능한 해방의 논리이다.

25. 지배 질서의 전복은 다음과 같은 전망을 갖는다.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421).

공산주의는 그리하여 [참다운] 개인성이 없는 개인주의의 환영과 혼동되지 않는, 개인적 자아실현을 위한 사상으로 보인다. 종은 각각의 고유한 발전을 통해 필요, 능력의 범위, 그리고 종의 보편적 발전에 적합한 조건을 발견한다. 상호적으로,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없이 고려될 수 없으며, 해방은 결코 고독한 쾌락이 아니다.

26. 이러한 관점을 견지할 때, {선언}은 세밀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엥겔스가 좀더 이후에 얘기할 그 방향성만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과장하여 중요히 여길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방향성이란, 다양한 각도에서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들에 대한 전제적 침해"(420)를 중요하게 조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토지소유의 몰수, 고율의 누진세, 상속권의 폐지가 제기된다.

이는 경제보다 정치를 우위에 놓으며, 개인적 이득보다는 공동의 재산을, 개인적 측면보다는 공적 측면을 우선시하고, 신용의 집중, 운송 등의 공공서비스, 공기업의 창출, 황무지 개간을 통한 토지정리, 전 국민에 대한 무상교육 등을 전체적인 계획으로 포괄하고 있다.

결국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노동 분화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는 농촌-도시의 분리, 농업노동과 공업노동의 분리 등이 포함된다.

27. {선언}은 태어날 때부터 정치적 흐름 속에 있었으며, 이러한 정치적 현실은 언제나 다양한 형태하에서 노동자 계급 운동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신화적 과거에 빠진 노스탤지어적인 '봉건적 사회주의'는 반동적 인민주의의 다양한 변종으로 나타난다. 해방의 물질적 조건, 사회과학의 탐색 및 그것의 조건의 창출이 가능한 때를 파악하지 못한 채, 공상적 사회주의는 과학적 공상주의로 쉽게 빠져든다. 또 다른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 질서의 사회적 변칙사례들을 인류애적 도덕의 이름으로 복지조직을 통해 수정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러한 개혁주의자, 유토피아주의자, 과학주의자 등의 현재의 반동적 성향중에서 주목할만한 것이 하나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미성숙한 시기, 즉, 그들의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부재한 상태는 조잡한 평등주의 혹은 조잡한 공산주의를 조장한다. 이러한 특징은 관료주의적 전제라는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자유로운 연합하에서의 국가 소멸과는 거리가 먼 이런 현상은 사회의 통합적 국가화를 완수한다. 자본주의적 착취의 소멸 대신 기생적이고 관료제적인 착취형태하에서 원시축적을 실현하는 것 말이다.

28. 해방의 도정에서 정치권력의 점유는 경제적 이행과 문화적 해방의 지렛대가 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뿌리뽑기 위해 스스로 정치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 계급으로의 고양,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곧 "민주주의의 쟁취" 및 보통선거의 확립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418∼420).

사회발전과 계급 적대의 약화에 따라 대중의 권력은 말하자면 정치적이라 할 수 있는 특징을 잃을 처지에 있다. 파리 꼬뮌은 지배하고 제압하는 권력이 아닌 생동하는 권력에 의한 국가권력의 쟁취로 인식될 수 있으리라. 기생적 국가를 없애고 사회 해방의 정치적 형태를 획득했던 파리꼬뮌은 사회의 비범한(surnatural) 조산아였다.

문제는 이와 같은 대담한 갈망이, 국가관료기구적인 모든 물신주의에 반대하는 자유를 향한 조바심이, 민주주의를 제도적, 사법적으로 숙고하려는 인내심있는 정교화의 과정을 일축해버렸다는 것이다. 기존 질서의 약화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라 믿어졌던 것이다.

29. {선언}이 소유, 권력의 점유와 민주주의 및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구성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간의 경험은 그것들의 결함과 약점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적 계급에서 정치적 계급에로의 연속적 이행이 정치투쟁의 특수성과 민주주의의 제도적, 사법적 형태를 고려하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생산, 소유 관계의 변혁을 위한 혁명은 재생산 관계 전체의 변화를 기계적으로 결정하는 듯이 보인다. 자동적으로 가정된 변화가 노동의 종류와 분할의 전복, 권력 관계 및 성 관계의 전복에 대한 정교한 생각을 일축하려는 듯이 말이다.

되돌아온 유령을 환영하며

30.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약속과는 연계된 적이 없는 공산주의 기획으로서, 이 거대한 희망 가운데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유일한 사실은 프랑스 혁명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민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근대적 노예제도와 역사적 사건들 및 정치적 예언들에 도전하는 것이며 이는 매우 중요하다. 군주제로의 복귀가 인민의 단결과 시민정신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것과 같이, 현재의 보수 회귀가 스탈린주의가 침해했던 분배의 원리를 박탈할 수는 없을 것이다.

31. 외부적으로 부르주아지라는 적에게, 내부적으로는 관료제라는 적에게 우리는 두 차례 꺾였으며 종종 기만을 당하기도 했는데, 우리의 가장 큰 실수는 가능한 모든 지위를 공유한다는 식의, 인간에 대한 과대평가에 기인한다. 불행한 기억에 대한 신의 마지막 흔적으로 지워졌던 이 경계를 넘으려 시도했다고 아무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정도의 시도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역사 앞에 굴복하고 말았더라면, 그래서 자발적으로 노예의 길에 빠져들었더라면, 부끄럽고 모욕적이며 보다 심각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32.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 세계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계급의 희화화되고 위조된 모습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지난 날보다 더 폭력적이며 더 불평등하다.

언제나 세상을 혁명으로 뒤바꾸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지난 시대의 실패와 결함은 이러한 거대한 변환의 경로와 방법을 회의하게 한다.

역사적 경험에 따라, 혁명이라는 사고는 세 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근대사회의 변환의 대수 공식으로서 우선 해방된 인류와 갈망하는 미래로서의 불확실한 이미지라는 신화적 의미를 벗게 되었다. 1848년 혁명과 파리 꼬뮌이라는 유혈의 시련을 통해,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불가분하게 연결시키면서 실질적 내용을 지니게 되었다. 전쟁과 변혁으로 동요하는 우리의 시대에 혁명은 결국, 뜻하지 않은 사고와 부조리한 사실, 파괴된 세계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 행동, 운동, 결단의 감각, 전략적 내용 등이 응축된 것이다.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가공할만한 결합은 종으로서의 인류와 문명의 위기를 낳고 있다. 이는 경각심을 일깨울만한 모든 동요하는 층들을 향한 혁명적 언설의 긴급함을 알린다.

비록 상황이 불충분하고 새로운 도정이 불안정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구식 무기를 갖추고서 언제나 전쟁에서 한 발 뒤지는 군대처럼, 혁명가들은 언제나 혁명에 한 발 늦은 행보를 취하고 있다.

위대하고도 영웅적인 주체없이 그저 범속한 혁명을 상상하는 것, 동원의 신비화를 탈각시키는 것 등이 우리가 해결해 나아가야 할 것들이다. 영구혁명은 현재의 비참함 속에서의 정치적 대결 국면과 문화 및 경제적 변혁의 지속 과정을 연결해 준다.

33. 아름다운 미래라는 큰 희망으로 시작한 이 세기는 애초의 희망의 환각에서 깨어나는 중이다. 자신의 여정에서 폐허더미를 뒤로 한 채 이 세기는, 미래가 협소화와 암흑,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는 자들의 소멸과 아직 그렇게 할 수 없는 이들의 무능력함 사이에 끼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필요하지만 공산주의의 선구자들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어렵게 느껴진다. 어떠한 거대한 물신도, 신적 전지전능함도, 역사의 단죄도, 과학의 절대 진리도, 열린 가능성을 지닌 역사의 불확실성 앞에서, 진부하고도 인간적인 의무로부터 우리를 도피하게 할 수는 없다. 세계를 변혁하는 것, 그것은 또한 세계를 다시 한번 해석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신적 역사의 가상적 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할수록 우리는 더욱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럴 때에는 굳은 의지에의 신념도 없이, 역사에 대힌 일언반구도 없이 의심스러운 결론 속에서 점점 세속화되어, 불확실한 것을 위해 노력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성공에의 보장이 없는, 오류와 실패의 위험이 있는 이러한 실천은 현존 질서를 폐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필요성에서 강요되는 도박이다.

34. 그러한 이름들로 행해진 범죄를 볼 때, 이러한 단어들은 다른 단어로 새롭게 고쳐야 할 정도로 병약하고 타협적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남아 있다(굳이 얘기하자면, 우스꽝스런 공산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단순히 공산주의가, 자본의 폭압적 논리에 맞서는 투쟁의 가장 정확한 역사적 표현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스스로를 주체로 선언하면서 다시 일어서는 봉기는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실험에 만족할 수 없는 해방운동가의 운동이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거기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는 거역할 수 없는 평등의 원칙과, 지배, 착취, 강요된 동의, 사나운 완고함 사이에서 균열되고 어긋나 있으며 이러한 불일치는 자유라는 단어 속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