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ies But Goodies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삶과 신학

에버하르트 베트게 엮음, 고범서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 대한기독교서회, 1995.
디이트리히 본회퍼, 허혁 옮김,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출판사, 1998.

추선영(카피레프트 모임)


혹시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소개할만한 마땅한 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순간 {옥중서간}이 떠올랐다. 매우 오래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문득 떠오른 데 대해서 스스로 놀랐지만 수년전 본회퍼라는 신학자를 처음 소개받았을 때 그의 삶과 신학이 필자의 마음에 남겼던 진동이 아직도 미미하게나마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 감동으로 이 글을 쓰겠다고 선뜻 나선 모양인데 그것을 후회하게 되는 데는 하루도 안 걸렸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그 진동의 근원이 이 책의 내용보다 그 인물의 삶으로 인한 것임을 깨닫게 된 데다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신학이라는 학문이 그다지 재미있는 읽을꺼리는 아닐 것이라는 것도 곧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소개할만한 가치는 충분하니 그런대로 이야기를 진행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독자들도 읽어나가는 고난에 동참하시라.

매우 진부하고 썰렁한 농담으로 시작해보자. 사람들이 천국에 가서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새로운 사람이 천국에 들어왔는데 예수가 갑자기 신도 안 신은 채 맨발로 뒤어나가 그 사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포옹도 하고 매우 기뻐하면서 환영을 받은 그 사람의 직업은 목사. 사람들이 천국에서조차도 목사는 사랑을 더 받는다며 불평하려는 순간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람이 천국에 들어온 최초의 목사라네. 그러니 내가 어찌 기쁘게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아, 목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들 한다. 왜 그럴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최초의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였다. 예수라는 한 사나이가 갈릴래아 지방에서 활동을 하고 십자가에 달려(십자가형은 로마형벌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를 벌하는 형벌이었다) 죽은 이래로 유대교가 아닌 예수(Jesus Crist)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시초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이들은 공동생활로 버텨나갔고(원시 기독교 공동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가 된 이래로 약 천년 간을 서방세계를 움직이는 유일무이한 원리로서 자리잡은 거대 종교가 되었다. 물론 이제는 하나의 선택사항이 되어버렸지만. 즉, 근대 이후로 기독교는 세계의 원리로서 사회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신학은 두가지 도전을 받게된다. 한가지는 칸트(I. Kant)의 계몽주의적 도전, 즉 하나님에 관해서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두 번째는 프랑스 혁명 이래로 제시되었던 사회학적 도전 - 누구나 한번은 들어보았을만한 -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다. 기독교신학은 19세기 이래로 이 두가지 도전에 끊임없이 대응해왔다. 그리고 본회퍼 역시 이 두가지 도전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첫 번째 도전에는 "성인된 세계"와 "타자를 위한 교회"로 응수하고 두 번째 도전에는 그의 삶으로 응수했다.
그렇지만 기독교적 실천에 있어서는 그러한 신학적 고민이 올바로 수용되지 못한 채 종교라는 사회학적 범주와 맥락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의 정통교리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왕국론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루터의 두 왕국론이고 이로써 은총은 본회퍼의 표현대로 값싼 은총으로 전락했으며 개인주의적 신앙으로 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단순히 구원을 제공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장소이면서 율법의 공간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그리스

도인이 아닌 Church Goer로서의 기독교인만이 남게 되었다. 교회와 세계가 분리되는 것(성/속)이 정통교리이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이러한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간다. 그리고 천국에 갈 것이다(설마). 사회 속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는 너무나도 비정치적이다.

그것이 올바르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일까? 목사는 역시 천국에 가기는 틀린 모양이다.

"유대인을 위하여 소리치는 자만이 그레고리안 찬가를 부를 수 있다."

독일인들에게 양심으로 여겨지는 한 목사가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21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적 기적"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박사학위를 마쳤고 24세에 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된 신학자이자 목사로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를 이끌고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1945년 4월9일 교수형에 처해지기까지 신앙과 행위가 일치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삶과 신학에서는 신앙과 행동, 개인적 경건과 정치적 책임, 자유와 복종, 의인과 성화, 교회와 세상,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고 일치한다.

한겨레 신문에서 조사한 20세기 20대 뉴스 중 지구촌 흔든 재앙 편에서(한겨레 1999년 10월 15일 17면) 전문가가 뽑은 재앙 1위가 2차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2위가 유대인 600만명 학살이었다. 물론 네티즌이 뽑은 순위에는 유대인 학살이 6위, 2차세계대전이 11위였지만. 유대인학살에 대해서는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치 정권 하에서 벌어진 대학살극에 그러면 독일 기독교는 그에 대해 어떤 응답을 했는가?  교회는 무엇이고, 기독교인들을 무엇을 해야 했을가?  본회퍼의 물음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대다수의 독일인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저항한 사람은 소수였고 목사들마저도 독일제국교회로 편입되어 나치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위에서 세계에 대해 비정치적인 주류신학에 관해 이야기 했다. 그와 반대로 본회퍼는 철저히 정치적 저항권을 주장했고 살아냈다. 그의 신학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생애와 함께 이야기해보자.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는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 석학이던 하르낙(Adolf von Harnack)에게서 천재적 신학도라고 극찬받으면서 그의 학문기를 보냈다. 히틀러가 독일 교회를 포섭하여 단일한 집합체로 만들고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려 할 때 그는 히틀러가 집권한 다음날 "지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제목으로 라디오 강연을 하였고 히틀러의 위선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교회통합정책은 꾸준히 진행되었고 "독일 기독교인" 그룹은 나치당에 철저히 동조하게 된다. 제국교회가 성립하자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를 교회의 정신으로 내세우며 기독교를 개조하려 했으며 이에 "긴급목사동맹"이 결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독일 '고백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본회퍼는 지속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출간된 그의 생애 최대저작인 {복종}(Nachfolge; 국역 {나를 따르라})이 간행된다. 그를 걱정하는 동료들이 전쟁이 발발하던 1939년에 그를 미국으로 보내지만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한달여만에 독일로 돌아온다.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저항운동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고 히틀러 암살이 실패하면서 체포되었다. 44년 마지막 히틀러 암살기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45년 4월 9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옥중서간}은 그가 43년 투옥되어서 45년 중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옥중에서의 기록이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10년 후"는 히틀러가 집권하고 나서 10년 후의 단상을 정리한 편지 글이다. 그리고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이 책의 편집자인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에게 보내졌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의 신학적 사고는 대체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신학의 일관된 주제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다(그리스도 즉, 예수에 관한 연구분야를 신학에서는 기독론이라 한다). 그러면 그의 기독론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는 그리스도를 저 세상의 존재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말씀, 성례전, 공동체로서 나를,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그리스도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 - 첫머리의 말처럼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인 제자직은 그의 주저 {나를 따르라}에서 명쾌하게 제시한다. 제자직은 은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번역본의 번역이 30년이 지난 지금에는 고답적이지만 인용해보면

값없는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기율을 무시한 세례요,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 은밀한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이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산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한 은혜가 값없는 은혜라 하겠다.

값비싼 은혜는 그리스도의 제자직으로 부른다. 제자직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을 뜻하고 '신앙'이란 복종의 행위인 것이다. 같은 책에서 그는 예수가 제자들을 부를 때 - "나를 따라오라"에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순종하는 행위를 역설하면서 믿는 자는 순종하고 ... 순종하는 자는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제자의 길을 성실히 가는 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교회로서 존재하며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대로 형성되도록 구체적인 판단과 결단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음을 의미하는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단계인 궁극이전의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세계의 만남에의 참여를 통해서 이루진다고 하여 루터의 두 왕국론을 극복한다.

그람시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기독론의 정점은 감옥에서의 사색으로 이루어진다. {옥중서간}의 편자이자 그의 절친한 친구인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들에 매우 단편적이긴 하지만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성인된 세계', '타자를 위한 교회' 등의 개념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현대신학의 조류를 크게 바꾸어놓는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 비종교적 기독교라는 개념들이 탄생한다. 1944년 4월 30일의 편지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도대체 기독교란 무엇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란 누구인가 하는 문제라네. 그것이 신학적인 말이건, 신앙적인 말이건 간에 말에 의해서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네. 마찬가지로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 즉 일반으로 종교의 시대도 지나갔지. 우리는 완전히 무종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네. ... 중략 ... 종교가 기독교의 하나의 옷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무종교적 기독교란 어떤 것일까? ... 중략 ... 무종교의 세계에서 교회, 개체교회, 설교, 예전, 기독교의 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네. 우리는 종교 없이, 다시말하면 형이상학이나 내면성 등등의 시간적으로 제약된 전제 없이 어떻게 신에 대해서 말할 것인가?  어떻게 '세속적으로' 신에 대해 말할 것인가?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무종교적·세속적으로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 중략 ... 여기서 궁극 이전의 것과  궁극의 것과의 구별이 새롭게 중요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무종교성의 문제는 비단 본회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19세기 이래로 신학자들은 근대가 제기한 두가지 도전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대응했다. 본회퍼는 불트만(Rudolf Bultmann)과 바르트(Karl Barth) 등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무종교성의 개념을 구체화해간다. 역시 일관되게 기독론을 중심으로. 좀 더 인용해보면 1944년 5월 25일의 편지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생의 중심이지, 결코 우리들에게 미해결의 문제를 대답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 것이 아니라네. 어떤 문제든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 역시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라네. 그리스도에게는 '기독교적 문제'라는 것이 전혀 없네.

이러한 무종교성은 세계의 성인됨에 기인한다. 즉, 더 이상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성인된 세계를 향해서, 세게는 신이라는 후견인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네. ... 중략 ... '궁극적인 문제' - 죽음, 죄책이 그것이다 - 는 여전히 남게 되며 거기에 대해서는 다만 신만이 답을 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과 교회와 목사가 필요한 것이라네. ... 중략 ... 그러나 어느날엔가 가서 '신 없이' 대답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 중략 ... 세계의 성인성에 대한 기독교 변증론의 공격은 첫째로 무의미하고, 둘째로 저열하고, 셋째는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네(1944년 6월 8일의 편지)

그는 정통 기독교의 개인적, 내면적, 사적인 기독교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외면적 행위를 중시하여 너무나도 율법적인(한국기독교의 대표적인 예는 술/담배/제사의 문제이다) 기독교에 대항하여 '종교적 행위'는 반드시 무언가 부분적인 것이라네. '신앙'은 무언가 전체적인 것이요, 생활행위이고, 예수는 새로운 종교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생(生)에로 부른다네. ... 중략 ... 이러한 생은 이 세계에서의 신의 무력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1944년 7월 18일 편지)

그의 기독론이 드디어 정점에 달하고 있다. 이 초안에서 그는 성인된 세계에서 신의 의미를 그리스도에게서 구한다. 1944년 8월 3일의 편지에서

신앙은 ... 중략 ...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이다. 예수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초월경험이다. ... 중략 ... 신앙이란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 관여하는 일이다. ... 중략 ... 교회는 그것이 타인을 위해서 있을 때에만 교회이다.

그의 신학은 내연적이며 동시에 외연적이고 세속적이면서도 교회적이다. 성인된 세계 즉, 더 이상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속화된 세계에서 기독교는 종교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라는 원리로서 세상과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일원으로서 기독교는 이 세계와 공존하고 참여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모된 교회의 성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영생을 빌거나 이 땅에서의 안위를 비는 기복신앙이 아니다. 또한 이미 주어진 율법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계의 만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임재하는 은혜이며 그것은 타자를 위한 존재인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미국으로 갔던 본회퍼가 한달만에 귀국하면서 라인홀드 니버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가 미국에서 돌아오기까지의 고뇌와 결단을 볼 수 있다. 그의 삶의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을 독일로의 귀국은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 세계에 어떻게 책임감있게 관여하려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여기 코핀(Coffin) 박사의 정원에 앉아서 저는 제 상황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리고 저의 조국과 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기도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 있다는 것이 실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저는 독일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우리 조국의 이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동포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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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나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으로부터 차의 핸들을 빼앗아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 자신의 신학의 주석을 피를 철철 흘리며 자신의 생으로 써갔던 본회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 위대한 신학자가 영원의 세계로 가버렸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의 신학은 그 자체로도 현대신학을 뒤흔들기에 충분했으므로 그가 살아있었다면 현대신학의 지평은 지금과는 매우 다르게 흘러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감옥에서도 그는 꾸준히 책을 부탁하고 읽고, 새로운 책의 초안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투옥되기 전에도 이미 강연과 설교 금지, 거주지 신고의 의무, 저술·인쇄·출판 금지를 당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의 신학사상은 빛이 났고, 베트게에 의해서 편집 출판된 그의 미완성 원고들은 미완결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고 있다. 지금도 기독교윤리학에서는 빛나는 저작인 {윤리}(Ethik; 국역 {기독교윤리}) 역시 미완결 원고를 모은 것이다. 본회퍼의 신학이 현대신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60년대의 유신론과 무신론 논쟁, 사신신학(God is dead Theology), 세속화 신학, 상황윤리에 영향을 주었고 '억눌린 자와 함께 하는 신학'인 해방신학, 민중신학, 흑인신학에도 그 맥이 닿아있다.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오늘날의 한국기독교는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과 대화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현현으로서의 교회는 세계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가?  읽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답은 조금씩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이 한반도에 몰아칠 때 교회는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암울해진다. 박정희 정권에 기독교는 이를 비호해주면서 성장했고(진중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2}, 개마고원. 6장 참고) 광주의 피에 대해 피흘리며 동참하지는 못하고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각 교단의 유수한 목사들이 참여하여 축복기도를 해주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현실.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한 세상 편안히 살고자 하는 광기. 이 땅에서 본회퍼의 신학은 혹은 자생적인 신학인 민중신학은 어떻게 답하고 어떻게 실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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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ies but Goodies는 말 그대로 오래된 책에 대한 소개일 것이다. 그런데 소개된 책은 95년판이다. 으음∼ 신간이군? 그렇지는 않다. 최초의 번역은 현대총서라는 시리즈물 중 한권으로 출판되었던 것(1967년)인데 이번에 소개한 판은 번역을 약간 바꾼 것으로 95년에 개정했다. 그렇다고 내용적인 면은 바뀐 것이 없으며(하다못해 역주나 해설조차 똑같다) 단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어투를 하게체로 바꾼 것 뿐이다. 옛판은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
관련해서 들었던 몇가지 생각. 놀랐던 것은 본회퍼의 책과 본회퍼에 대한 연구서가 꽤 많이 또한 일찍(60년대 번역) 번역되거나 연구되었고 되고 있다는 사실이고 기가 막혔던 것은 60년대에 번역되었던 번역본을 판형만 달리하여 그대로 찍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론과 실천이 극심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증거인데 신학계야 높은 관심을 가지건 말건 기독교 실천은 자기 갈 길을 꾸준히 가는 것이다. 소 귀에 경 읽기 라고나 할까. 이러한 현상은 쉽게 변화되지 않을 듯 하다. 기독교 신학은 본회퍼를 높이 평가하고 끊임없이 그의 신학을 완성된 것으로 만들어가겠지만 기독교 실천은 도무지 거기에 응답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 본회퍼의 저작들

  • Eberhard Bethge 엮음, Wiederstand und Ergebung, 고범서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 대한기독교서회
     
  • Dietrich Bonhoeffer, Nachfolge, 허혁 옮김,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출판사.
                      , Ethik, 손규태 옮김, {기독교윤리}, 대한기독교서회.
                      , Gemeinsames Leben, 문익환 옮김, {신도의 공동생활}, 대한기독교서회.
                      , Schopfung und Fall, 문희석 옮김, {창조, 타락, 유혹}, 대한기독교서회.
                      , Christologie-Vorlesung, 이종성 옮김, {그리스도론}, 대한기독교서회.
                      , 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
                        Berlin 1930.
                      , Akt und Sein. Transzendentalphilosopie und Ontologie in der systematischen Theologie, Guetersloh 1931.
     
  • Gesammelte Schriften. Hg. von E. Bethge.(GS I∼VI).
     
  • Dietrich Bonhoeffer Werke. Hg. von E. Bethge.(DBW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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