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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서 미래를 엿보다


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 16회
(이 시리즈는 PICIS의 <인터내셔널뉴스>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85년 대우자동차 파업과 구로 동맹파업

20년 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인 바로 그 시기, 80년으로.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의 빈 자리에 눈독 들이며 3김이 추악한 암투를 벌일 때, 민중은 전쟁과 60년 4월 이후 또 한 번 열려진 '가능성의 공간'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며 다시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군사독재로 얼룩진 과거의 잔재를 씻어내고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가는 작업은, 12·12와 5·17 쿠데타를 통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여 5·18 광주민중항쟁을 짓밟은 저 신군부에 의해 잠시 멈춰지게 된다. 민주주의의 꿈이 다시 좌절되고 가능성의 공간이 닫혀지면서 노동운동에도 한파가 몰아친다. 피묻은 권력을 위해 급조한 국보위라는 해괴한 단체를 통해 마련된 노동법 개정안, 기업별 노조 체계와 제 3자 개입금지 등으로 대표되는 그것은 박정희 때보다도 더 개악된 것이었다. 그와 함께 신군부는 유신의 혹한 속에서도 살아남은 민주노조들을 각개격파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청계피복노조, 반도상사노조, 콘트롤데이타노조가 81년 봄부터 깨져나갔고 최후의 보루이던 막강 원풍모방 노조마저 '간부연행 및 이후 해고->항의 단식농성->남성노동자들로 짜여진 구사대 투입->광범위한 해고와 어용노조로의 변형'이라는 전형적인 과정을 통해 무너졌다.

이제 완전한 암흑기로 빠져든 것일까?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그렇게 믿고 싶었겠지만, 새로운 세상을 향한 움직임은 얼어붙은 수면 아래에서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광주민중항쟁과 80년의 패배를 거치면서 70년대 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모두에서 이루어졌다. 전태일 이후 70년대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던 학출의 노동현장으로의 투신은 80년 광주를 거치면서 전면적으로 진행되었고, 노동운동 내에서도 80년대 초 민주노조들이 차례차례 무너지게 된 중요한 내적 이유였던 기업 단위의 고립분산적 활동을 뛰어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83년 말부터 블랙리스트 철폐운동 등을 거치면서 점차 회복기로 접어든 노동운동은 이른바 유화국면을 맞이하여 84년부터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신규노조 결성(구로동맹파업의 주축을 이룬 대우어패럴노조, 가리봉전자 노조 등도 대부분 이 시기에 결성된다) 및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을 활발히 벌여, 85∼86년에는 노동쟁의가 급증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의 상당 부분에는 80년대 초부터 존재이전을 행했던 학출들의 활동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84년 5월 대구에서 시작되어 부산, 마산, 인천 등으로 확산된 택시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같은 해 11월 역시 운수노동자였던 박종만 씨 분신사건은 운수노동자들의 의식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자 노동운동 진영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박종만 씨 분신사건이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던 데서 보여지듯이, 이러한 노동자들의 움직임과 일반 대중 사이에는 아직 두터운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국민들에게 노동운동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5년 대우자동차 파업을 거치면서였다.

85년 4월 16일부터 25일까지 열흘에 걸친 대우자동차 노조의 파업은 몇 가지 점에서 70년대 민주노조운동과는 다른 점을 보여주었다. 주로 경공업 분야의 중소기업 단위에서 미혼여성노동자들이 주도했던 70년대와 달리, 대우라는 국내 굴지의 대재벌 사업장에서 (주로 구사대로 활약하면서 여성노동자들을 진압하는 데 투입되었던 오명을 벗어던지고) 남성노동자들이 억센 팔뚝을 드러냈다는 점은 70년대를 거치면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재편된 한국자본주의의 변화양상을 반영하는 것이자 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을 주도할 세력을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어용 위원장을 밀어내고 민주파로서 파업 과정을 주도하면서 김우중과 마주앉아 협상했던 이들이 다름 아닌 80년대 초 현장투신한 학출들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언론이 '학출=불순세력'이라고 호들갑스레 떠들어대며 분열을 유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업 기간 내내 현장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했다는 점에서 현장노동자들과 학출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요구안이던 '임금 18.7% 인상'에 가까운 16.4% 인상에 합의하고 열흘 만에 파업은 막을 내리고 조합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6월 24일, 이틀 전 위원장이 불법연행된 대우어패럴 노조의 파업을 시작으로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이 연대파업에 들어가고 그 다음날부터 구로공단 내의 다른 작업장에서도 지지농성에 돌입하면서,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인 역사적인 구로동맹파업이 시작되었다. 파업의 계기는 대부분 84∼85년에 만들어진 신규노조였던 이들이 같은 공단 내에서 인접해 있었고 노동조건과 노조에 대한 탄압이 비슷했기에 처음부터 개별 사업장을 뛰어넘어 연대하는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85년 초의 임투 역시 함께 준비하고 대처해 나간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권으로서는 이러한 구로 지역의 연대 흐름을 조기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을 뿐 아니라 두 달 전의 대우자동차 파업의 여파가 확산되지 않도록 미리 눌러놓고자 했기 때문에 그 해의 임투도 이미 마무리가 된 상황에서 위원장을 연행하는 선제 도발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위원장이 잡혀간 대우어패럴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것은 그렇다 쳐도, 다른 사업장으로 불길같이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 동맹파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노조 결성 때부터 인근의 작업장들이 연대했던 경험과 함께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반성에서 찾을 수 있다. 정권과 자본이 대우어패럴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도 분명한 상황에서, 그리고 81∼82년 민주노조들이 기업 단위를 넘어 연대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파괴당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에 이들은 대우어패럴에 대한 도발을 계기로 개별 기업 단위를 넘어 구로공단 차원에서 연대파업을 벌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진행된 구로동맹파업은, 파업 5일째인 6월 29일 대우어패럴 노조의 농성장에 구사대가 투입된 후 구속 35명, 해고 2000명이라는 상처를 남기고 종결되었다.   

두 달 간격으로 일어났던 이 두 파업은 이후 노동운동의 행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당시 노동운동의 두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우자동차 파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현장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임금인상)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외부단체의 지원을 거부한 것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기업별 노조의 틀 내로 의식적으로 한정한 상태에서 임금문제에서의 승리 경험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일까. 이들의 합의각서의 내용은 지나치게 굴욕적(예를 들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문구)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파업 이전에 해고된 3명에 대한 복직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인데, 이는 비슷한 시기에 노동자들이 학출과 끝까지 함께 하면서 노조 민주화에 성공했던 통일산업의 경우와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전반적으로 고려해본다면, 대우자동차 파업의 성격을 '경제주의적'이라고 규정하고 격렬하게 비판했던 당시 일부의 흐름이 근거없는 것만은 아니었다(물론 당시 경제투쟁-정치투쟁에 대한 이해에 도식적인 측면이 많았고 현장노동자들과 다른 마인드로 상황을 바라보는 지식인적인 요소를 고려했을 때 지나친 측면은 분명 있었다고 생각하지만)고 보여진다. 이에 비해 구로동맹파업은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임투가 이미 마무리된 상황에서 노조 활동 탄압에 대한 항의로 같은 공단 내의 10여 개 사업장이 개별 기업의 한계를 넘어 연대파업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개별 자본 차원을 넘어 정권에 맞서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당시 운동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투쟁 종결 후 노조가 깨지고 조합원들이 흩어진 점에 주목하여 모험주의적이었다는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이에 대해 당시 투쟁을 주도했던 이들은 동맹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노조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는 예를 들며 '피할 수 없는 투쟁'이었음을 강조한다), 전반적으로 당시 운동 진영은 80년대 초부터 이미 간헐적으로 제기·논의되어오던 정치투쟁의 필연성과 경제주의 극복의 필요성을 보여준(그런 의미에서 대우자동차 파업과 대조되는)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계기로 '정치적 노동운동, 변혁지향적 노동운동'을 내걸었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과 같은 지역적 대중정치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평가는 당시 학생운동 내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노선분화와 맞물리면서 이후 다양한 분파의 형성을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했고, 80년대 초 대거 현장으로 인입했던 학출들(당시 노동현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사이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면서 전체 노동운동 내에 쉽게 섞이기 어려운 두 경향이 생겨나게 된다. 학출들은 대우자동차의 경우를 현장 중심 노조활동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로, 구로동맹파업을 정치투쟁 지향의 근거로 받아들이면서 현장 노조운동의 틀거리 밖으로 눈을 돌려 정치투쟁을 지도할 활동가조직, 더 나아가 이후엔 노동자정당의 건설을 급선무로 삼은 다수의 경향과, 현장노동자들의 경제적·일상적 요구 해결에 기반한 노조 활동에 주력하는 소수의 경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학출들이 현장에서 상당 부분 빠져나옴에 따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은 이완되기 시작했고, 이는 또한 선진적인 활동가 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과정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의 결과만을 놓고 손쉽게 폄하하기엔(그리고 그 반대 경향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엔) 정치투쟁으로의 전환이라는 문제의식이 만만치 않은 무게와 적절한 부분을 지니고 있었던 점은 분명하지만, 정치투쟁에 대한 당시의 다소 도식적인 이해가 일반 노동자들과 긴밀하게 교감하며 대중적인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현장 활동의 중요성을 적절히 인식하지 못했던 측면이 존재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당시 현장 수준에서는 여전히 낮은 수준의 경제적 요구 및 인간적인 대우와 노조결성의 자유를 요구하는 정도가 일반적(이는 정치적 동맹파업으로 평가되는 구로 지역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이었으며, 실제로 87년 대투쟁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이라는 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하지만 아쉬움을 남긴 조급함'에 대해 보다 냉철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노동운동의 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던 이 두 파업은 87년 대투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대우자동차의 경우 중공업 분야 대기업 남성노동자들의 주도라는 점에서, 구로의 경우 중소사업장이 밀집한 공단에서 노동조건이 비슷한 인근사업장으로 하나의 불씨가 들불처럼 번져나간 측면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구로동맹파업이 87년 대투쟁과 더 잘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분야이긴 하지만 노조결성, 임투, 파업 등에서 인근 사업장들과 함께 하는 '연대'의 정신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구로의 경우를 보면서 마창노련이 떠오른 건 그래서일까. 이들이 훗날 함께 전노협의 주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내 편견이 적절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김덕련 <카피레프트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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