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정태인의 정성진 비판에 부쳐(1)
올린이 : rieudm (류동민)  98/06/11 14:51  읽음: 26  관련자료 없음


불순(不純)을 가장한 순수, 다산(多産)을 가장한 불임(不姙), 그리고 자아도취에 관하여 : 정태인의 정성진 비판에 부쳐

류 동 민


 

이 글은 정성진의 한국사회경제학회 발표논문("경제위기 논쟁과 맑스주의 공황론")에 대한 정태인의 비판(한사연 CUG, 테마게시판)에 부치는 글이다.
 

0. 개인적으로는 대학선배이지만 정태인의 글, 아니 그의 말에는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을 것같은 재기가 번득인다. 그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최소한 나우누리 통신망에 정태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올라오는 글은 거의 빠지지 않고 읽는 편이다. 때론 무릎을 치며 감복하기도 하고, 때론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상념에 젖기도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왕성한 필력은 예외없이 (그의 글에 반박하고픈) 나의 정열과 노력을 압도한다. 언젠가는 어떤 글에 대한 반론을 준비하다가 채 마무리짓기도 전에, 또다른 주제의 글이 몇 개나 올라오는 걸 보고 제 풀에 지쳐 포기한 적도 있었다.

...하물며, 나와 정태인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짐작되는 바, 오랜 세월을 '땅에서 뒹굴며' 한국경제의 현상분석에 몰두하였을 정태인에게, 그다지 많지도 않은 시간을 추상적인 이론유희에 몰두하였고 한국경제라면 '80년대초 세미나에서 읽었던 '한국경제의 전개과정' 정도의 지식밖에 없는 내가, 한국경제의 위기에 관한 주제로 시비를 거는 것은 해보나마나 승산도 없는 일이거니와, 정태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논쟁거리도 안될 공산이 크다.더구나 내가 정성진의 입장을 전폭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5월 23일 연세대학교라는 real-space에서 정성진-정태인간에 어떤 설전이 오갔는지를 모르는 형편인 바에야, 그저 가만 있는 것이 중간은 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태인의 '주체할 수 없는 재기(才氣)'를 한편으로는 시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바라보아온 나로서는 뭔가 한마디 하는 것, 더구나 cyber-space의 문제는 cyber에서 해결하는 방식이 적절할 것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정태인(선배)에게 무슨 사적 감정도 없고 이 글을 올림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사거나 무례함을 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최소한 장문의 글을 통신에 올리는 문필가에 대해 설익은 감상이라도 표현해주는 것은 오히려 내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경의를 표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1. 먼저 정태인의 수많은 글에 흐르고 있는 '무지(無知)'나 '현실감각'을 가장한 '오만(傲慢)' 또는 '자아도취'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나와는 별로 나쁜 기억이 없는 선배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는 한번쯤 반드시 지적해주어야 할 것이며, 그렇다면 내가 해주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하의 지적은 문제가 되는 이 글의 내용에만 국한하기로 한다.

첫째, 글을 쓰는 스타일의 문제이다. PC통신이라는 매체의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문장에는 불필요한 '오만'과 '자아도취'가 너무 많다. 뒤집어 말하면, 자신의 따라이스트 또는 자신이 기꺼이 따라이스트가 되기를 자청하는 대상(예컨대 박현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무시(無視) 내지는 비하(卑下)가 도를 지나친다. 이러한 태도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 자신의 '지적 수준'과 '현실 경험'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조목조목 짚어보자.

1) "...능력이 없는 나를 특별히 지정해서 '한수 가르쳐 주기'를 자청한 정성진 교수의 '옛정'에 감사를..." : 이 문장이 진짜 감사한다는 뜻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정성진이 자신을 '특별히 지정'하였다는 사실이다. 정태인을 지정토론자로 선정하는 5월초의 회의에 참석했던 나로서는 (그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정성진이 정태인을 '특별히 지정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안다. 설사 그랬다친들 그것이 이 글의 내용이나 논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바로 몇 문장 뒤에서 정태인은 "...이 자리에 불려온 것이 그저 한탄스러울 뿐이다.

(정성진의-인용자)순수가 유능을 보장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라고 말한다. 이 문장과 앞에 인용한 문장을 함께 읽는 나의 솔직한 심정은 '제발 이런 식으로는 그만 하라'는 것 뿐이다. 스스로의 말 마따나 "학계의 논의에...감히 말함으로써 참여할 능력이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안 나오면 그 뿐이다. 80년대에 말발을 날렸던 사람들끼리 한판 붙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픈 사람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가 나오기를 애원하지 않는다. 물론 그의 진심은 딴 데에 있다. 자신은 '불순'하지만 '유능'하다는 것, 그래서 '한 수 가르쳐' 주어야 할 사람은 정성진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2) 그리 길지 않은 이 글에도 이러한 식의 표현은 꽤많다. 만약 정태인이 특정 서클 내에서만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최소한 공병호 정도로만 유명한 사람이었더라도, 문체를 통해본 그의 정신분석에 대해 논문을 하나 쓰고 싶을 지경이다. "편하기도 하고 밥벌이가 보장된 교수의 고고한 주장으로는 그럴 듯하지만"이라든가, "정성진 교수는 내가 그래도 존경을 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학계 선배중 한명...군계일학(sic!)"...."정성진 교수와 내 사이에 있는 천양지차의 지적 수준..."이라는 표현 뒤에 예외없이 즉각 따라붙는 오만함("그래도 (내가-인용자) 하려고 하기만 한다면 정성진 교수 수준(sic!)의 논리적 정합성과 인용문으로 이 글을 대치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그러나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정성진 교수보다는 좀더 땅에서 더 뒹굴었을 내 경험..."이라는 표현은 결국 정태인 자신이 '고고한 교수'나 '창백한 강단사회주의자'와는 달리 풍부한 현실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의 '현실경험'에 대해 나는 일단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 경험이 값진 것이라면, 스스로 반복해서 강조하기보다는 남이 알아서 경의를 표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는 더욱 값질 것이다. 만약 정태인 보다 훨씬 더 어려운 땅에서 뒹군 누군가가 글을 쓰거나 어떤 주장을 한다면, 정태인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물론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왜냐하면, 그 누군가는 땅에서는 많이 뒹굴었지만 '지적 수준'은 정태인보다 떨어질 것임에 틀림이 없으므로... 우리는 이미, 정태인 자신이 정성진에게 그 부활을 꿈꾸지 말라고 충고하는 '80년대의 사회성격논쟁에서 이런 식의 불필요한 표현들을 물릴 정도로 얼마나 많이 보아 왔던가?


2. 이제 좀더 '비판'의 내용에 다가보자.

- 먼저 '스탈린주의'와 '포스트주의'가 뭔지 모르겠다는 지적에 대해...정태인 식으로 표현하자면, 스탈린-트로츠키논쟁이나 포스트 들어가는 말에 대해 별로 공부한 적 없이 귀동냥으로만 알고 있는 내가 읽어보아도 정성진이 말하는 '스탈린주의'나 '포스트주의'자가 누구인지 알겠는데, 정태인이 모른다니 이해가 안간다. 구체적인 실명까지 오르내리고 있는데? 학회에서, 그것도 비교적 동질적인 관심과 학습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모인 학회에서, 한국경제위기에 대해 발표를 하면서, 8-90년대 한국에서의 스탈린주의나 포스트주의에 대해 개념정의부터 하면서 글을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내가 정성진 글이 담고 있는 트로츠키적 편향성이나 대책없는 지식인적 급진성을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비판하고 있는 정태인 류의 스타일이 정성진에게도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는 정성진 글의 합리적 핵심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이론적 논의의 지형(terrain)이 '국민경제살리기'라는 구도로 기정사실화되었고, 좌파적 논의들이 그 의도야 어찌되었건 그러한 지형 속에 끌려들어감으로써 위기극복의 모든(또는 상당한) 부담이 노동자계급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지형의 변화를 시도해야 함을 주장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글쎄, 정성진이 아무리 대책없는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한들, 정태인이 예단하듯, 당장 전세계 인민이 단결하여 세계혁명을 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어쨋든 이 문제는 내가 정성진이 아니니 길게 말할 자격은 없다. (*)

이러한 맥락에서, "(정성진에게 있어-인용자) 정치라는 공간은 일방적으로 지배계급의 전술이 관철되는 곳으로 돌변한다. 그러한 한 사실은 '진보진영'의 이론과 실천이 트로츠키적 이행기강령으로 무장한다고 하더라도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손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귀 씻고 산 속으로 들어갈 일이다."라는 주장은 상대를 극도로 단순화시킨 다음에 짓밟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정성진은 현재의 '국민경제살리기'의 지형이 그렇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며, 이를 돌파해야한다는 주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월급깎이고 정리해고 당하면서도, "그래도 민주노총 파업은 곤란하다. 왜? 일단 경제가 살아야 하니까? 경제가 살려면? 정치사회적 안정을 통해 외자를 적극 유치하여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니까..."라는 DJ정부로부터 우리 마누라까지 포함하는 광범한 대중적인 인식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 "[정성진의 주장은-인용자] (순수)맑스주의든 아니든 정치라면 반드시 해야 할 '계급 주위로 대중을 끌어모으는 방안...에서는 한참 벗어나 있음에 틀림이 없다."라는 지적에 대해...원칙을 벗어나더라도 계급헤게모니 블록만 형성하면 되는가? 무엇 때문에? 직업적 노동운동가들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그렇다면, 금모으기운동이나 실업기금마련을 위한 사랑의 전화걸기 운동을 통해 열광적인 국민성원을 바탕으로 지지세력을 넓히기만 하면 되는가? 정성진도 지지한다는 '실질임금 삭감없는 주35시간 노동제 쟁취를 통한 200만 일자리 창출'은 트로츠키주의적 근본변혁을 전제한 것이므로 안되는가? 노동자계급은 정성진 같은 한갓 '창백한 강단사회주의자'의 음모에 놀아날 만큼 어리석은가?

-"누가 더 맑시스트인가 논쟁할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나를 사로 잡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정치의 공간에서 신고전파/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저지하고 있는...또다른 '부르주아 프로젝트'를 집어넣는 일이다. 자본주의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에 있어 같더라도 서로 다른 유형의 자본주의가 경합하는 현실에서 '좌파'는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부정적 대답을 유도하는 마지막 질문에 나는 정태인의 의도대로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자, 그렇다면, 과연 '국민경제살리기운동'의 현실적인 논의구도 속에서 앵글로색슨형이건 라인형이건 정태인이 바라는 보다 개선된(또는 덜 나쁜) 자본주의의 유형을 관철시킬 정치적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근본변혁을 위해 이행기강령을 내걸자는 요구가 실효성이 없는 만큼이나 이러한 주장도 실효성이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경제를 살리면 노동자가 죽고, 경제를 죽이면 노동자가 산다'는 정성진의 슬로건을 파국론으로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제가 현재의 정세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정성진의 글을 읽어보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신은 온갖 자기도취와 오만으로 점철된 문학적 표현을 다 사용하면서, 남이 사용한 수사적 표현을 가지고, "그렇다면야 북한이나 아프리카야말로 노동자계급이 완전히 승리한 곳이다"라는 극단적인 비판까지 가하는 것은 최소한 공정한 게임의 룰을 위반하는 것이다. 바로 '내가 사용하는 수사(修辭)는 로맨스고, 네가 사용하는 수사(修辭)는 불륜'이라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각주까지 달면서 아무 상관없는 양우진까지 등장시키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 "나는 그에게 감히 제안한다...대통령 선거공약을 만들 듯이 현재의 한국경제 개혁방안을(아니 이 말이 싫다면 구체적인 '사회주의'강령을) 만들어 보자고..."라는 결론에 대해.물론 정성진의 주장이 스탈린은 잘못 했지만 내가 주장하는대로(또는 트로츠키가 교시한대로) 하면 (사회주의를)잘 할 수 있다는 의미라면, 나 역시 거부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태인 자신은 어떤 유형의 자본주의로 가는 것이 개선이냐를 가지고 고민하기에 바쁘다면서, 먼저 경제위기에 대한 인식틀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만들자는 제안은 하나마나한 제안이다.


3. 정성진이 '한 번도 날아본 적이 없는 구형비행기'를 타고 있다면, 정태인은 최근에 '제도주의 경제학'이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아무도 타 본적이 없는 새로운 수입제 비행기로 갈아탄 것으로 보인다. 문학적 표현과 빈정거림으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래도 냉철한 분석이 엿보이는 부분은 2의 (1) "현재 제출되어 있는 '부르주아 위기론'과 '진보진영'의 위기론"일 터인데, 짧은 분량으로 다양한 논의를 간결하게 요약한 탁월한 서베이능력을 높이 사고 싶다. 그런데 정성진도 이러한 종류의 서베이를 하고 있으므로, 제대로 된 글이 되려면, 먼저 이 부분에 대한 평가를 가지고 서로의 견해차이를 짚어보는 것이 필요했다.(*)

(*) 물론 앞서 지적하였듯이, 5월 23일 연세대라는 real space에서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어쨋든 cyber에서는 안되었으므로...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언뜻 언뜻, 그러나 확고하게 비치는 그의 이론적 지주(새로운 비행기)는 Aoki로 상징되는 제도주의(또는 '맑스주의 제도주의?)임에 틀림이 없다. 글쎄, 나는 그가 이 새 비행기의 목적지나 잘 알고 탔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타게 될런지도 모르지만, 정성진이 '순수이론'으로 현실을 재단한다는 비판이, 언젠가는 '순수제도이론'으로 현실을 비판(또는 옹호)한다는 비판으로 그에게 되돌려지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