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진보정당으로 간다



이재영 (국민승리21 정책국장)

- 나우누리 국민승리 21 게시판에서

 

진보정당은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의 시급한 문제

80년대 이후 세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 모두 참여한 세력은 김대중 정파와 민주진보진영 뿐이다. 그런데 왜 한 쪽은 청와대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고, 한 쪽은 아직도 재야에 머물러 있을까? 김대중 정파는 선거 결과가 어떠하든 기본 대오를 유지하며 줄기차게 도전하여 왔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투표 종료와 동시에 사무실 문을 닫아 걸고 뿔뿔이 흩어지곤 했다.

지난 10여 년 간의 정치세력화 시도는 각급 선거의 실패에 뒤따르는 정치역량의 주기적 유실에 다름 아니었고, 이러한 역사가 국민승리21의 한계와 오류로 나타났다. 우리는 또 한 번의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 지난 2월 21일 국민승리21 중앙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하여 정치조직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하였는데, 이 결의에는 위와 같은 정신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운동은 정치적 대변자의 부재와 역할 미분화, 즉 시대적 낙후로 인해 큰 고통을 받고 있다. 내외 조건은 운동 질서의 재편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간 유지돼온 '재야운동'의 조직 형식과 운동 방식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따르지 못하고 있으며, 다양한 수준의 단체가 모인 '재야협의체'는 정치적 구심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 '재야'의 고수는, 디지털 핸드폰을 든 수십 수백 만의 선남선녀가 거리를 활보하는 시대에 70년대에 만들어진 시커먼 구닥다리 전화기가 울리기만을 기다리며 골방에 머무는 것과 같다. 또, 정치적 필요가 생길 때마다 '정치부대'를 급조하는 방식 역시 국민에 의해 '정치 철새'로 낙인찍히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정치조직(정당)과 대중조직으로의 분별 정립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또한 우리는 국가·정당적 진보운동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사회적 토양도 주목해야 한다. 아마도 향후의 민주진보운동은 집권을 목표로 하는 진보정당과 탈계급적(또는 전국민적) 이슈를 관장하는 시민운동, 각 계급·계층의 대중적 이해에 입각한 대중운동으로 삼분 정립될 것이다. 각각의 주체는 한국 사회의 진보를 향한 연대의 기조 하에 분업체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연합전선은 조직 형식이 아니라, 연합 정신에 입각하여 이 세 운동을 총괄 조정하는 운동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운동 질서의 재편은 조직 형식의 재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운동 질서의 재편은 지도사상, 지도주체, 운동관행 등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쇄신, 재구축을 기반으로 하여야 한다. 국민승리21이 만들고자 하는 진보정당은 '열린 정당'이다. 흔히 '진보연합당'이라 불려지고 있는 것이 국민승리21의 진보정당 상이다. 진보연합당이라는 의미는 전위당론 - 사상 중핵의 외연적 확장에 의한 단일정치대오의 당 건설론을 지양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진보정당은 다양한 정책을 가진 다양한 정치세력이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당 내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운영될 것이다. 즉, 특정 정파 또는 세력의 선험적 우월성을 인정치 않고 공개·객관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집단이 헤게모니를 구축, 행사하게 되어야 한다.

조건의 미비를 이유로 창당을 기피하는 경향이 민주진보진영 내부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오해는 진보정당을 과정이나 운동이 아닌 완결로 바라보는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창당은 당의 완성이 아니다. 당의 역사는 당적 내용(질)의 확산과 강화 과정이며, 그 역사에서 창당의 시점은 당적 내용이 최초로 발기하는 때이다. 즉, 당은 창당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당의 강화에 의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창당 조건이 부족하다는 진단에도 동의할 수 없다. 진보정당을, 하늘을 향해 성장하는 한줄기 나무로 바라본다면 당연하게도 우리의 현재가 왜소하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보정당은 한 줄기 나무가 아니라, 얽히고 설킨 거대한 넝쿨이다. 한국 사회의 모순에 뿌리박은 이 넝쿨은 민중당, 한국노동당 등 수많은 줄기를 거쳐 왔고, 지금은 노동계급이라는 기름진 토양에 힘입어 민중의 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국민승리21은 이 넝쿨에서 가장 굵은 줄기, 열매를 맺는 줄기가 되려 한다.

그리고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창당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조건들을 살펴 볼 때 그러하기도 하지만, '준비된 자세'로 2000년 총선을 맞기 위해서라도 창당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음이다.

 

2000년대는 한국 사회 내부 체제 경쟁의 시기

진보정당 뿐 아니라, 민주진보진영 전체가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고용 안정 등 민중생존권 엄호 투쟁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현 정세는 지난 10년 간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성취한 민주주의와 근로대중의 복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어떠한 이유로도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가 근로대중에게 전가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당면투쟁을 지난 10년의 성과를 사수하고, 대중과 긴밀히 결합하여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분기점으로 자리지워야 한다.

우리는 먼저, 현재의 난국을 극복하는 방법이 즉자적 '경제 살리기'나 보호무역주의를 조장하는 '경제 주권 되찾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체제를 개혁하는 것, '체제 바꾸기'라는 사실을 선전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고 세계화한 자본의 위협에 대항하여 '운동의 세계화', 민주주의와 생활조건을 수호하기 위한 연대를 새시대의 기치로 내걸어야 한다.

이 투쟁은 수세적 측면 뿐 아니라 공세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개발 독재 모델에서 새로운 사회 체제로의 전환기에 놓여 있다. 김대중 정권은 이른바 '유연성 강화' 모델 즉, 민중의 고혈을 빨아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미국식 초보수주의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많은 시점이라는 데 우리의 희망이 있다. 우리는 사회복지 등 공공투자 확대를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장기 발전 여건을 조성하는 유럽식 모델을 내세우고, 체제 경쟁을 벌여 나가야 할 것이다. 이 투쟁의 결과에 따라 21세기 한국 사회의 모습이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우리의 온전한 대안일 수는 없다. 유럽식 모델은 우리 고유의 모델을 갖지 못한 상태를 메우기 위한 과도 대안일 뿐이다. 소비에트형과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는 양자 모두 이미 실패하였거나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국가주의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대안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색과 실험을 통해,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참여에 기반한 제3의 길을 찾고자 한다.